故 백남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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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0 12:5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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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의 살아있는 신화였던
백남준 선생님이 1월29일 타계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해프닝으로 부터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술로 만들어 낸 현대 예술의 살아있는 신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징표적 인물이자 가장 원초적인 무당
독일 케피탈선정 세계 100대 예술가 5위!!
미국 아트뉴스 선정 세기의 미술인에 피카소, 모네, 뒤샹과 어깨를 나란히 한 한국인 백남준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지요. 사기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악평 같은거, 내가 일생동안 악평 오죽 보았어요.
이제 악평같은 거 받음 받을 수록 예술가가 자라지요.
신념 가지고 했으니까요
난 원래 어리광쟁이로 자라서 그저 그때 하고픈 일을 그냥 해요
그러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됩니다."
출생 : 1932년 07월 20일
출생지 : 서울 학력 : 일본 도쿄대학교 미술사학과
직업 : 비디오 아티스트 데뷔 :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 개인전(전자텔레비전)
수상 : 금관문화훈장(2000), 교토상(1998),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경력 : 대통령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
이화여대 미술대학원 석좌교수(1999),
독일 캐피탈 선정 세계의 작가 100인 중 8위(1997),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1996),
중앙일보 밀레니엄위원회 자문(1989),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초빙(1978)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짐, 2006년 1월 29일 미국에서 사망
작품 다다익선(1988)
지금까지 실현된 비디오 작품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작품으로 한국의 개천절인 10.3일을 의미로 1003개의 모니터로 이루어져있으며 거대한 지구라트를 연상케한다. 각각의 모니터화면이 밖을 향하고 있는 텔레비젼 수상기로 구성되어 있고 그화면위에서 전개되는 동영상을 빠르게 움직이며 변화한다. 바닥에서 부터 램프를 따라 걸어올라가면서 볼수있도록 만들어진 이구조물은 백남준이 제작한 가공이미지와 퍼포먼스
작품 시스틴성당(1993)
높이 쌓아올려진 프로젝터들은 전체공간을 진동시키는 듯한 표현적인 전시효과를 이루어냈다. 각각의 프로젝터에서 투영된 이미지들은 서로서로 인접하여 뒤섞이고 중첩되어 천정과 벽의 표면에 콜라주되면서 역동적인 시각적 공간을 창출한다. 방을 가로질러 프로젝터 주변을 걸어다니면 전체공간을 무용수들의 색조와 합성이미지, 추상적 패턴과 형상들로 가득차 일렁거리는 것을 느낄수 있다 방전체에 투영된 화면의 환영적 깊이가 공간에 대한 감각을 확장 시킴에 따라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비디오 즉 텔레비젼을 매체로 하는 현대미술의 한 경향. 미술이 대중문화의 우세에 눌리자 이에 대한 반격이자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분야. 백남준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수많은 작가들이 비디오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비디오는 양식이 아니라 매체이므로 비디오테이프작품과 설치비디오의 두 가지 분야로 나뉜다. 설치비디오는 그 본질상 조가의 성격이 강하며 비디오 장비나 TV수상기를 이용한 설치물이다. 설치된 수상기에 다큐멘터리 이미지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이미지를 녹화, 재생할 경우 비디오테이프와 설치비디오의 혼합으로 볼 수 있다. 비디오 아트는 영화에 비해 제작과 상영이 비교적 편리하며 영화처럼 대 자본에 종속될 염려가 없다는 점과 대중매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담아내기 적절하다는 점에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비디오아트는 미술이 대중문화의 주목하기 시작한 분야로서, 상업TV의 저난적 기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TV의 기본적 원칙들의 상당부분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시청자에 대해 TV가 갖는 직접성과 단순성강한 영향력 등은 비디오 아트가 하나의 예술형식으로서 대중적이며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한다. 1970년 백남준이 자신이 개발한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비디오조각과 그의 아내 구보타시게코가 뒤샹에게 바친 <뒤샹피아나>연작 등이 있다.
그의 스승 존 케이지
백남준이 나에게는 두명의 스승이 있다고 말해왔는데 그 한사람이 존케이지다. 현대 음악사의 한 위대한 거목인 케이지는 인생과 예술에 대한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생각을 가진 음악가이며 플럭서스의 이념적 스승이었다. 케이지는 일본의 선 사상에 심취했던 사람으로서 인생과 예술, 소음과 음악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인생이 예술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음악이란 의도적인 무목적성이나 무목적인 놀이에 불과하며 예술은 살아있음에 대한 일종의 경축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1952년 여름에 지금은 전설적인 사건이 된 세계 최초의 해프닝을 벌였고 우연과 비결정성이라는 작업 원칙을 써거 작품에서 개인 취향과 가치 평가르루거부한 그는 또한 음악 공연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이기도 한 일종의 극 (theater)라는 신념을 펼쳐보였다. 백남준의 대학 학사 논문 에서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그는 뉴스쿨 실험 음악 교실과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로 플럭서스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담했을뿐 아니라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는 현대미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수립한 비결정성, 과정, 우연, 멀티미디어, 시청각적 기술, 소음이론 등 무수한 전위적 개념을은 예술이 삶의 연장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디딤돌이었던 것이다.
케이지는 1992년 8월 13일 뉴욕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79세를 일기로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의 한장르 이상이 다르게 발전했을거라고 말할수 있는 극소수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이다.
조지 마치우나스(건축가)
백남준 예술의 중심을 이루어온 플럭서스는 미국의 건축가였던 조지 마치우나스가 발행한 잡지 "플럭서스"로부터 이름이 비롯되었다. 플럭서스는 20세기 초 다다 운동처럼 기이하고 우발적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다다 운동과 1960년대 플럭서스의 유사한 관계는 미국의 조지 마치니우스가 플럭서스를 "미국의 네오 다다"라고 언급한데서 잘 나타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형식을 싫어하며 개성을 존중하는 예술 건달패들이 이른바 플럭서스이다.
플럭서스의 창설자 조지 마치우나스는 플럭서스의 존재 이유를 "고급 예술이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 우리는 플럭서스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말에는 플럭서스가 반고급예술을 위한 실천 집단처럼 묘사되고 있다. 조지 마치니우스가 프랑스의 플럭서스 작가 벤 보티에에게 이런 플럭서스 철학을 표현하였다. "그대의 에고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제거하라. 작품에 사인을 하지 말라. 아무것도 그대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탈개성화하라.탈 유럽화하라." 마치우나스는 플럭서스 창시자라는 송을 갖고 있지만 강한 개성과 독재로 인하여 예술가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플럭서스인들은 모아주는 구심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67,1968년에는 소호, 코업 로프트 시스템을 처음 실행하여 소호가 예술가 촌이 되는데 기여한다. 뉴욕 플라자 호텔앞 거리를 닦는 플럭서스 거리청소 이벤트, 자신이 만든커피ㅡ 홍차등을 판매하는 플럭서스 음식 이벤트, 더글러스 대학 교회에서 플럭서스 예배, 자신이 발명한 장애물 경기, 거대한 글러부를 끼고 시합하는 권투등 플럭서스 올림픽을 발상 주도하는 등 철저한 생활 예술을 실천하였다. 1970년 중반부터 메사추세츠의 뉴 말보로에 물러나 암으로 투명하던 중 1978년 2월 25일 빌리 헛친스와 결혼하였다. 이 의미심장한 결혼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프리 헨드릭스는 플럭서스 웨딩엘범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석달도 채 안된 1978년 5월 9일 마키우나스는 보스톤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백남준에게는 늘 돌아갈 정신적 고향이었던 플럭서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예술로서 제 2의 플럭서스 운동이 나타나는가 하면 플럭서스 2세대, 3세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