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의 초상 20171027 작가론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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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09 14:4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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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작곡가 이혜성’
[작곡가 이혜성 인터뷰]
음악학자 오희숙
2017년 2월 10일 금요일 오후 5시 (강남 라 그릴리아)
인터뷰 및 정리: 오희숙 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우리 시대에 작곡가로서 산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격변하는 사회 그리고 개인적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갈등과 장애물 속에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창작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은 부단한 노력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작곡가 이혜성은 그 작업을 조용하게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창작자라 생각한다. 그동안 ‘소리 건축가’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견고한 음악세계를 구축해왔던 그녀는 [기름새], [마루타], [깨어있음]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와 역사에 민감한 작곡가의 면모를 보였으며, [미소]·[고요] 시리즈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작품에 담아왔다. [죽란시사],[허난설헌] 등의 작품에서는 한국의 전통 사상을 깊이 있게 표현하였고, [다름], [물길] 등에서는 서양음악을 주체적 시각에서 수용하는 자신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11편의 방대한 [치유] 연작을 통해서 현대의 삭막한 삶을 사는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슬픔이 치유되는 평화로운 집”을 짓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진행해 왔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이혜성의 음악의 바닥에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함께 하고 있다. 음악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한편으로는 풍부한 독서로 풀어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밀한 기법의 모색으로 실험하면서, 늘 하나의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는 모습이 그녀의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그래서 이혜성의 음악은 빠르게 변화되는 테크놀로지의 홍수, 급변하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정신적 위로가 되는 동시에 한 단계 더 깊이 있게 문제에 대면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던 어느 금요일 저녁 작곡가 이혜성을 만나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 창작 세계 되돌아보기
오: 그동안의 발표된 선생님의 작품과 음반 등을 전체적으로 보면, 참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작품 하나하나에 써넣은 해설이 인상적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한지가 이제 30여년 되셨죠. 이러한 활동의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이혜성: 유학이 끝날 무렵부터 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지만 창작생활을 한지 30년은 더 된 것 같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작곡가로서 쉬지 않고 뛰어왔다는 것이 저로서도 잘 믿겨지지 않네요. 글쎄요, 지금까지 작곡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언가를 음악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그 욕구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마르지 않은 채 샘물처럼 제 마음에 항상 샘솟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죠. 삶 속에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를 항상 찾으려하는 호기심 또한 중요한 힘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아픔을 되새기고 달래주고 싶은 마음, 나에게 늘 위안을 주는 자연에 대한 동경 등은 늘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 테마 입니다. 특히,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제 창작의 중요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슬픔과 울분은 제 창작 의욕을 자극시키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소재 중의 하나였습니다.
얼마 전부터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 ‘돌아와 보는 밤’을 읽으면서 이 시를 소재로 작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제 작품 목록을 살펴보다가 같은 시를 소재로 유학시절에 두 개의 작품을 썼다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시를 바탕으로 가곡과 두 대의 기타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었는데, 기타 곡은 베를린 국제 작곡 콩쿨에서 1등을 했더군요. 30년이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들 중에서 같은 시를 작곡의 소재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어요. 비록 하나의 작은 예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작곡가로서의 사명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 민족의 가슴에 남아있는 역사의식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저는 더 힘이 납니다.
오: 그 동안의 선생님 창작 활동을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창작의 흐름에서 어떤 큰 전환기가 있었는지요?
이혜성: 스스로 시기별로 구분지어 보지 않았습니다만 굳이 나눠보자면 크게 세 개 정도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일 첫 번째 시기를 꼽자면, 오스트리아 유학(Wien 국립음대, 1984년 2월~1990년 9월)을 마치고 돌아온 후 30대 초반부터 2003년까지 지금 제가 생각해도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고민하던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귀국 후 처음 썼던 작품 제목이 ‘깨어있음”인 것도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기는 대학시절부터 유학기간까지 10년간의 긴 배움의 과정을 토대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집중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1998년에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음대에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아직 혈기가 넘치던 나이였기에 역사의식의 표출이 매우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염두에 두고 창작했던 [세포, 1993], [기름새, 1993], [상한영혼을 위하여, 1995], [낮은 목소리, 1998], [두드림, 2000], [고즙, 2000], [다름, 2001], [마루타, 2002], [표적, 2003], [새야새야, 2003] 등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을 떠올려 보니 당시 제 마음을 가득 채웠던 민족의식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두 번째 시기는, 2004년부터 2013년까지의 약 10년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2007년과 2014년에 두 번의 연구년 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2년 간 창작 활동을 잠시 쉬기도 했습니다만, 작곡가로서 현대음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현대음악을 바라보는 제 시선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즉, 많은 시간과 에너지로 힘겹게 빚어낸 작품들이 한 번의 발표로 너무나 쉽게 사장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마도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내 작품이 오래오래 청중에게 감동을 주며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불협화음이 정석이고 원칙이라던 고집이 조금씩 꺾이면서 협화음의 사용에 대하여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 시기가 작곡가로서 가장 큰 전환기였고 또 그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 역시 가장 컸었기에 매 순간 견뎌내기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기를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서였는지, 2009년부터는 [치유]라는 제목의 연작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현재까지는, 작곡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을 차분하게 정리해 가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정진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 새 정년까지 햇수로 한 자리 수로 남았습니다. 욕심을 줄여가면서 제가 지나온 삶의 향기가 가득 배어 있는 그런 작품들을,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빚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지금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그 동안 수없이 넘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끝끝내 놓지 않았던 ‘애씀’의 시간과 기억들이 지금에서야 제가 조금씩 영유하기 시작하는 평온과 기쁨이라는 소중한 과실로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 제목인 ‘기도’와 ‘라온’(즐거운)이 지금의 제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 선생님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자신의 음악세계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혜성: 먼저 제가 이렇게 창작을 계속하는 것에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어머니는 6.25사변 때 개성에서 피난을 오셨는데 의과대학을 다니시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 학업을 포기하고 자식을 키우셨던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의 삶에서 항상 호기심을 놓지 않는 창의적이고 치밀하고 깊이 파헤치는 성격을 갖고 계셨어요. 현재 8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공부에 어찌나 몰두하시는지 병원진료를 기다리실 때도 메모해온 성경구절을 보고 계시는 모습에 지금도 매번 놀라워한답니다. 저의 창작 생활에는 이런 어머니의 성격과 자라면서 지켜본 어머니의 삶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믿습니다.
또 한 분으로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님이셨던 백병동 교수님입니다. 정년하신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끊임없는 열정과 숙연한 자세로 창작 활동을 하시는 백 교수님이 제가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어오는데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16세기 이후 서양 작곡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은 작곡가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음악가가 말고는,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지금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에서의 보냈던 삶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신영복, 박노해, 황대권, 이해인, 김용택, 법정스님, 가톨릭 서적과 불교서적들을 주로 읽으면서 제 삶의 원칙을 세우고, 지켜가고 또 이를 바탕으로 이정표를 설정하는데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오: 그동안 건강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러한 면이 창작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군요.
이혜성: 네, 부끄럽지만 당연히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체력이 약하고 병약한 편이어서 고생을 많이 했었죠. 그런 이유로 다섯 살부터 쳤던 피아노를 고등학교 때 포기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작곡으로 강제로 전향 당한 것이 정말 고맙기만 합니다. 30대 이후에도 디스크 등 여러 가지로 힘들었는데, 이처럼 늘 생활처럼 함께했던 고통이었기에 당연히 제 음악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증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늘 긴장되어 있었기에, 작품을 쓰기 위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주어진 시간을 아껴 쓰고 안배해가며 창작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통’은 제 창작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고 당연히 작품의 구상 과정에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통증으로 마음까지 굴복당하지 않도록 마음단련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책을 접하는 시간이 남보다 더 많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습득한 책 읽는 습관은 지금의 작품세계 구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 건강 때문에 자포자기 할 수 있었을 터인데, 본인의 고통을 창작력의 원동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이혜성: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저는 꼭 질병이 주는 육체적인 통증과 더불어 제 스스로가 만들었거나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통이 유난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런 제 환경을 탓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아픔의 기억과 시간들을 통해 제 삶과 제 음악이 겸허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프지 않았고 늘 건강하고 씩씩했다면 ‘치유’ 시리즈도 이 세상에 없었겠지요.
오: 치유 시리즈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요? 또 왜 치유 연작이 유독 11번까지 지속적으로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이혜성: 말씀하신대로 ‘치유’는 11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리즈로 2009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치유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쓸 때는 연작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제목으로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11개의 ‘치유’ 연작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저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처럼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겠다는 것이 원래의 작곡 취지였으나, 한 곡 한 곡 이어질수록 작곡자인 저 자신뿐 아니라 함께 연주에 참여했던 연주자들은 물론 청중들까지도 위안을 얻고 기쁨을 공유하고 있다는 반응을 확인하였고, 그렇게 하다 보니 2015년까지 7년 동안 11번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논리와 음악
오: 선생님께서 쓴 글을 보면 ‘논리성’과 ‘음악성’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음악의 건축가라는 측면에서는 논리성이 중요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음악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과연 선생님의 창작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좀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자신의 창작 미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혜성: 창작 미학이라고 하시니 조금 부담스럽지만, ‘소리 건축가’ 혹은 ‘치유 작곡가’로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 기분 좋습니다. 30-40대에는 작곡을 할 때 워밍업 시간이 매우 길었어요. ‘전체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야 작품에 들어가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품의 구조 즉 논리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시작 뿐 아니라 어떻게 끝낼 것인가 역시 중요한 문제였기에 음의 높낮이, 악기, 구조 등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부터 작곡을 할 때 고려하는 우선 순위가 논리와 구조에서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즉, 음악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화가에 비유하자면, 30대에는 협화음을 촌스러운 원색물감이라 여겼기에 작업을 할 때는 원색은 당연히 제외시키고 여러 원색들이 버무려진 불협화음만을 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40대가 되면서 ‘왜 나의 작품 세계가 원초적인 것에서 출발하면 안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소리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 끝에 불협화음을 대하는 제 태도가 크게 바뀌게 되면서 논리와 구조와 같은 이론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듣기 편안하고 소리의 완성을 추구하면서 음악성을 보다 중요시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 작품을 듣게 될 청중의 입장에 서게 되면서, 그 전에는 애써 사용하지 않으려했던 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다시 말하면, 조성을 써도 키 없이 쓰는 스타일, 조성에서 생각하는 선율이 아니라 규제를 다 풀어 놓은 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작곡을 시작할 때 스케치 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어 이제는 바로 작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내가 내고 싶은 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게 창작해 내는 과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오: 그런 변화 과정에서 ‘치유’가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나요?
이혜성: 앞에서 말씀드린 제 창작 구도의 변화 과정에는 ‘치유’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에게 치유를 해주려는 목적의 작품이기에, 불협화음을 거칠게 쏟아 넣으면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더해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협화음 대신에 아주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영혼을 담은 소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죠. 그래서 현악기에서는 내 작품에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연주법인 아르페지오를 처음 시도해 보았습니다. 4개의 선을 속도감 있게 넘나들면서 만들어내는 아르페지오, 4개의 코드를 펼쳐서 만들어 내는 소리, 현악기 특유의 공명을 전제로 해서 나오는 그 소리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보통 아르페지오를 얘기할 때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의 아르페지오 사운드를 많이 연상하게 되기에, 그와는 다른 색깔을 내 보려고 했었고 작곡하기 전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작업을 진행하고 보니 제 걱정보다 훨씬 더 힘든 과정이었고, 심지어는 작업 중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제가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 사용하려던 아르페지오 주법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아르페지오 주법을 이용하여 작품을 완성시키면서 악기에 대한 연구까지 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선생님 작품의 대부분에는 제목이 있습니다: 미소, 치유, 허난설현, 죽란시사, 비움, 다름... 이러한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의 연관성 속에서 본인은 표제적 경향을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혜성: 제게는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이 다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작품을 쓰기 전에 스케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책을 읽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작품 소재로 적당하다 싶은 것이 있다면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을 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낯선 단어를 접하게 되었을 때 특히 주목하는 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작품 소재를 주로 얻고 있어서, 많은 경우 제 작품의 제목으로 곡의 성격을 연상하게 되고 또 제목 중에는 낯선 단어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모든 작품의 제목이 곡의 성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어떤 분은 제 작품 ‘고요’에서 고요한 적막의 음악적 표현을 예상했는데 처음부터 큰 소리가 나와서 의외였다고 하시더군요. ‘고요’를 작곡할 때, 저는 고요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자 강한 소리와 다이나믹을 대비시키려는 의미를 부여했었거든요.
오: 제목 없는 작품이 거의 없죠?
이혜성: 미술작품 중에 ‘무제’로 되어있는 작품도 있지만, 21세기를 살면서 제목이 없는 작품은 저에게는 무척 답답하게 보입니다. 뭉크의 ‘절규’를 보고 절규를 느끼듯이 제가 창작한 작품에 제목을 부여하는 것 또한 작품의 완성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제 모든 작품에는 얼굴처럼 제목이 있습니다.
오: 그렇다면 선생님은 제목을 정하고, 그 다음에 작품을 쓰시는 건가요?
이혜성: 네, 보통 그렇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을 만큼 제 마음을 움직이는 주제가 떠올라야 하기에 대부분은 제목이 먼저 정해집니다. 하지만, 제목이 정해졌다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어떤 것은 제목이 정해진 뒤 10년 만에 쓰는 것도 있고, 때로는 제목의 운이 좋아 연작이 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아직도 사용하지 않은 채 저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제목들이 제 구상 수첩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 제목이 창작의 출발점이 되는 군요.
이혜성: 저는 창작 과정에서 작품이 주는 의미 또는 메시지를 특히 중요시하기에 더 그렇게 되나봅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전달하는 음악도 필요하겠지만, 저는 음악을 통해 제가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생각과 메시지를 전달하려 해왔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제 작품의 제목에도 그런 의도가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 네, 제목을 보면, 사유하는 작곡가 그리고 고민하는 작곡가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그것이 또한 선생님 음악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3. 작품 들여다보기
오: 다른 주제로 넘어가 보죠. 작품의 악보를 보면 독특함이 느껴집니다. 즉 시각적으로 특이한 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름1]의 바이올린과 가야고(법금)은 한 음을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음악이 전개되고, [미소3]의 경우 하나의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치유의 경우 아르페지오적 프레이즈가 촘촘하게 계속 반복되는 경우 등. 시각적으로 특이하고 또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기법이 선생님의 개성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혜성: 제 악보를 시각적으로 감상해보지 않았기에 선생님의 관찰 평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작곡은 눈으로 보여지기 위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제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소리의 완성을 위해 최대한 충실하려 합니다. 그리고, 제 작품에서 패턴의 반복을 많이 발견하셨는데, 사실 30대 때는 반복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가급적이면 피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르페지오 기법을 활용하면서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작품에서 아르페지오를 한 번만 사용해서는 제대로 된 음악적 조직을 만들어낼 수 없었거든요. 또 제가 새롭게 발견한 아르페지오 음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반복이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쳐 반복된 패턴이 악보로 옮겨지게 되면서 오 교수님의 눈에 띄는 독특한 시각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아르페지오 주법을 제가 혼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아르페지오 주법이 다양한 악기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작품을 완성한 데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 아르페지오의 음 하나하나가 엄청 중요하죠?
이혜성: 네 맞습니다. 아르페지오를 구성하는 음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지요. 하지만 저는 아르페지오가 갖는 속도감이 특유의 다이내믹과 연결될 때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치 색에 물을 가했을 때 형성되는 수채화, 좀 더 음악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소리의 카펫(carpet)’을 뜻하는 독일어인 Klang Teppich가 연상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르페지오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아주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에까지 많은 고민을 기울였어요. 빠른 패시지와 대비되는 요소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었죠. 어떤 청자는 제 곡을 듣고 패르트(Arvo Pärt)의 [프라트레스 Fratres]가 연상된다고 했는데 패르트도 아르페지오를 정말 많이 쓰기에 틀리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패르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패르트와는 구별되는 저만의 독특한 색체를 가진 아르페지오를 쓰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오: 동종 악기를 위한 작품을 많이 쓰셨는데 (첼로 10대, 더블베이스 10대, 바이올린 10대, 플롯 앙상블) 이러한 작품에서는 어떤 측면이 나타나나요? 동질한 음향에서 무언가를 새로 끌어내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실제로 쓰면서 어떠셨나요?
이혜성: 현악 4중주보다 10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곡이 어려운 이유는, 듣는 사람이 저음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게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곡에서는 개방현 4째선 G음으로 저음의 역할을 하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 10대를 위한 앙상블을 한 번 더 쓰겠다고 했던 것은 첫 번째 앙상블(치유7)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마음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현악 앙상블보다 10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곡이 어려운 이유는 듣는 사람이 저음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게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곡에서는 개방현 4째선 G음으로 저음의 역할을 대신하게 함으로서, 다른 저음 악기가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하려고 했었죠. 재미있는 현상은 바이올린의 고음을 적게 쓰고 싶은 생각과 그간 깊게 고민하며 진행되었던 현악기의 배음과 개방현에 대한 고민이 융합되어, 동종악기에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테크닉이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새롭다고 하기보다는 기존의 연주법과 합쳐진 현악기 주법이 나왔다는 거에요. 자연배음과 관련된 트레몰로가 그것으로 과거의 작품에는 kometlee tremolo 라고 명명 했었고 최근 작품에는 치유9를 초연하는 과정에서 동갑 첼로주자 신상원 선생과의 대화 속에 천사의 날개가 파닥이는 느낌을 표현해서 ‘엔젤릭 트레몰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작곡하는 과정에서 제가 바이올린과 첼로를 직접 앞에 두고 오랫동안 탐구하면서 만들어낸 연주법으로,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하지만 좀 더 새롭고 깊이 있는 음악을 추구하려는 시도와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오: 엔젤릭 트레몰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이혜성: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의 개방현과 개방현의 하모닉스 소리를 지속적으로 교차하면서 쓰는 finger tremolo 기법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실제 악보를 보면 이 기법으로 어떤 소리가 만들어질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어떻게 소리가 채워질지는 쉽게 연상하기가 어려워요. 심지어 어떤 중견 연주자는 이 테크닉이 어떤 기법인지를 물어보기도 하더군요. 바르톡(Bartok) 연주자에게 요구했던 기법이 바르톡 피치카토(Bartok pizzicato)라고 불리듯이, 제 스스로 악기를 탐구하면서 수많은 시도를 통해 탄생한 것이기에 나중에 치유 ‘angelic tremolo’라고 직접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기법이 이미 다른 작곡가에 의해 시도되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제가 아르페지오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기법입니다.
오: 직접 악기를 가지고 하신 것이죠?
이혜성: 네 맞습니다. 작업할 때에는 해당 악기의 소리와 연주법에 대해 제가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제 작업실에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가야금, 장구가 있고 필요하다면 악기를 빌려서라도 직접 다루어봅니다. 타악기 곡 쓸 때는 연주자의 타악기 스튜디오에 가서 직접 연주해보기도 했고, 아침 일찍 학교 타악기 연습실에서 사운드체크를 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요즘 흔히 사용하게 되는 피날레나 시벨리우스와 같은 컴퓨터 사보 프로그램에서 나는 소리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컴퓨터 사보 프로그램이 처음 개발되었던 30대 때 이미 배웠었지만, photoshop을 거친 사진이 그렇듯이 기기를 거쳐 생성된 소리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할 때는 오선지를 이용한 수작업을 항상 고수해 왔습니다. 이런 고집에는, 컴퓨터를 이용하게 될 때 그 편리함으로 인해서 작업에 필요한 공력을 덜 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일조를 했었지요. 하지만 50대 부터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적 목적에도 컴퓨터 활용 필요성이 증가했고 그러다보니 제 스스로도 점차 피날레의 편리함에 조금씩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컴퓨터로 인해 제 창작 작업이 방해를 받거나 작품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가 되어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악기는 늘 곁에 두면서 악기 본연의 울림을 확인하게 되지요.
오: 최근 작품에서 조성적 삼화음과 선율이 등장하는 작품을 발표하셨죠. 예를 들어 [치유 9]의 경우에는 주제가 반복되고, 죽란시사에서는 무조로 진행하는 중간에 유니즌으로 뚜렷한 선율선이 등장하는데요. 이러한 선율이나 화음의 등장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인가?
이혜성: 네, 잘 보셨네요. 일종의 소리 선택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게된 결과라고보시면 되겠습니다. 최근 작품에서 보셨다는 그런 시도는 아마도 40대 즈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시선에 괘념치 않고 나만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때로는 좀 더 과감하게 소리를 표현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욕심이 점차 커지면서 이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작곡가로서 표현해낼 수 있는 선율의 영역을 확대, 창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 제가 가장 의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이제는 예전에는 전혀 쓰지 않았던 선율들을 다양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4. 한국에서 작곡가로서 산다는 것
오: 한국의 작곡가로서 한국적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이혜성: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네, 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처음 시작한 때는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오스트리아 유학 초기였습니다. 제가 학부 학생으로 교육을 받을 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던 과목이 바로 대위법이었는데, 비인에 유학해보니 비로소 대위법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문득, 그 때까지 제가 배워왔고 내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음악들이 유럽 사람들과 유럽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탄생된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뜻밖의 고민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록 그네들의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유럽에 와 있지만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작곡가라는 정체성이 조금씩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온전히 담고 있고 한국인의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음악과 우리 악기라는 생각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죠.
사실 국악을 전공하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어려서부터 서양음악만을 수십 년 간 교육받아왔기에, 전혀 낯선 우리나라 음악에 선뜻 마음을 열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음보다는 많이 늦은 30대에 시작해서 현재까지, 우리 국악과 국악기에 관심을 갖고 일종의 사명처럼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다행스럽게 느끼는 것은 학생들의 한학기 작품제출에 국악기를 사용하도록 되어있는데, 10년 전에 한국창작계보다 현재 작곡계의 조류가 국악기에 한층 가까워져 있어서 이를 반영하듯 학생들에게도 이젠 국악기가 낯선 요구가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혀 모르기에 못쓰는 것과 알면서도 안 쓰는 것과는 시작부터 차원이 다를 테니까요. 아무튼, 이런 긴 과정을 거쳐 저는, 우리나라의 악기와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면서 서양 음악적 사고와 우리음악을 자연스럽게 융화하는 작업 중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국악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는, 제가 피아노를 시작하기 전에 고전 무용을 먼저 배웠다는 것이에요. 어머님의 우리음악에 대한 사랑 덕분이고 제가 국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마도 본성적으로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오: 선생님께서는 국악기를 사용한 작품을 쓰셨는데, 직접 국악기를 배우셨나요?
이혜성: 조금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비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저는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서 장구를 배웠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악기를 시작하면서 왠지 제가 국악 장단을 잘 알고 있었다는 듯한 친근한 느낌은 결국 5살 때의 교육덕분 입니다. 40대에는 피리를 배우고 나서 가야금을 다시 시작했고 이어서 아쟁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국악기의 이름이 같아도 기능이 다른 악기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야금에도 정악 가야금, 산조 가야금 그리고 25현 가야금이 있었고, 아쟁에도 산조아쟁, 대아쟁, 소아쟁 등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게다가 저에게는 낯선 악기들도 많아서 국악 관현악곡을 쓰기가 쉽지 않았기에, ‘내가 왜 이렇게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나?’ 하는 후회석인 자문을 참 많이 했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자문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국의 작곡가이니까요.
오: 다 섭렵하셨어요?
이혜성: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서양음악이던 국악이던 섭렵이란 표현은 제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30대 젊은 나이일 때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쌍둥이 동생 덕분에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섭렵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었는데, 작곡을 하는 한 섭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제가 모르는 미지의 소리를 담은 악기에 대한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오: 그렇게 어려운 작업을 스스로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혜성: 저는 힘든 상황을 즐길 줄 아는 스타일은 전혀 아닙니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이 마르지 않고 샘솟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얼마 전에는 [미소3]과 [치유2]를 오랜만에 들어보면서, ‘내가 이 어렵고 힘든 곡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하며 내심 스스로를 기특해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힘든 과정을 거쳐 완성을 해냈을 때 느끼는 행복감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네요. 결과를 보면 성취감을 느끼지만, 실제 창작 과정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기 때문에 작품 하나를 쓰고 나면 온 몸이 탈진상태가 되면서 몇 일 동안 끙끙 앓곤 합니다. 그러하기에, 작품을 최종 마무리하는 단계가 되면 하루의 시간을 더 준다고 해도 더는 못 쓰겠다는 비장한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창작 과정에서 온 몸으로 느껴야 하는 이러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면역력도 생기지 않아서 매번 이런 힘든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한 가지 신기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작업하는 동안에는 컨디션이 최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체력적으로 모자라다는 인식이 몸에 배어있어서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습관이 붙어서 일지도 모르죠. 이처럼 창작과정에 몰입할 수 있는 데에는 남편의 배려 또한 큰 몫을 해줍니다.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제가 작업을 할 때는 전화도 잘 안하거든요 (웃음). 결혼하기 전 혼자 있을 때에는, 작업을 할 때마다 ‘나도 마음써주는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고’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농담을 했었는데, 이제는 남편의 배려로 작품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오: 특히 애정을 가진 작품이 있으신지요?
이혜성: 저는 모든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있어요.(웃음) 사실은 작품 마감에 맞추어서 무리하게 끝냈던 작품이 몇 곡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아픔으로 남게 되어서 그것들은 작품목록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면 당연히 모든 작품들의 평가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제가 완성했던 모든 곡들 하나하나가 제게는 소중하기에 다들 애착이 갑니다.
오: 선생님 창작에서 이론이 중요하게 작용하나요? 아니면 음악적 흐름이나 사유를 따라 자유롭게 창작을 하는지요?
이혜성: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를 말할 때 ‘시작은 강직하고 기본부터 철저히 하고, 배운 후에는 생각과 표출하는 방법이 자유로워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자세가 작곡가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철저히 계획하고 나서 작곡을 시작하는 편이었어요. 이런 배경에는 헝가리 출신 작곡가인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의 영향이 컸답니다. 제가 유학할 때 리게티가 비인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음악적 구조를 매우 세밀하게 계획한 그의 스케치를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거든요. 어쨌든 젊었을 때는 작품의 구조와 음악적 완성도에 더욱 철저하려고 노력했어요. 음악적 구조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색연필과 모눈종이를 도구로 사용하면서, 스스로 ‘소리건축가’라고 느낄 정도였죠.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는 직관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을 하는 편이에요. 그런 변화가 온 이유 중 하나는 오랜 단련의 시간을 통해 스케치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결과, 선생님의 용어를 빌려 얘기하자면, 지금은 창작을 하는 과정에서 사유의 범위 판단이 고정되지 않고 보다 자유로워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수하는 철칙은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그 악기에 대한 연주법과 얻어지는 소리의 가능성에 대해 최대로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면서 인터뷰를 마칠까 합니다.
이혜성: 인터뷰를 하면서 오희숙 선생님께서 오늘 인터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통해, 작곡가로서의 제 모습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로 저도 작곡가로서 살아온 지난 30년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되었고,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순간들이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해 주었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제게 작곡이란 주님 안에서 ‘제가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능력이 남아있는 한, 제 작품을 연주할 연주자는 물론 청중들과 음악적으로 오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있기까지 저를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오랜 시간 저에게 힘이 되어준 로댕(Rodin 1840-1917)의 글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 하겠습니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를 파고드는 물처럼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 진보란 더디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열리게 된다. 예술가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영감이 번뜩이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이며 질서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