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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과의 신의가 사회적 신의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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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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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과의 신의가 사회적 신의의 기본


1789년은 정조13년의 해입니다. 오랜 노론의 권력에 시달리던 정조는 본격적으로 정치개혁의 굳은 의지를 품고 실권(失權)세력이던 남인계의 우수한 관료를 등용하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이 해의 식년문과에 28세의 정약용이 2위로 급제하나 장원급제자가 취소되어 실질적으로는 정약용이 장원급제한 셈이 됩니다. 이 때 다산보다 6세 위이던 이기경(李基慶:1756-1819)이 같은 남인으로 다산과 동방(同榜)급제합니다. 급제 이전부터 가까운 사이로 함께 천주교 관계 서적도 읽으면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더구나 동방급제의 인연까지 맺어지니 정말로 다정한 친구가 됩니다.

그러던 이기경은 1791년 전라도 진산(鎭山)에서 윤지충·권상연 등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사건으로 순교하자, 입장을 바꾸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배척하며 강력한 반대의 편지와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다산도 진산사건이래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한다는 천주교 교리에 동의할 수 없고, 나라에서의 금함이 강고해지자 천주교에서 손을 떼었던 것으로 모든 자료는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뒷날 『벽위편(闢衛編)』이라는 천주교 탄압의 역사를 저술한 이기경은 친구이던 다산을 천주교도라 의심하면서 그들을 비방하고 음해하는 일만 계속하며 다산의 생애에 가장 앞을 가로막았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무렵 이기경이 귀양살이 중에 모친상을 당하자 다산은 옛 친구의 집으로 문상을 갔고, 많은 부의금도 보태며 “벗이란 친구 삼았던 것까지를 버려서는 안된다”(故者無失其爲故也 :『예기』의 공자말씀)라고 하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했건마는 이기경은 1801년의 신유옥사에서도 마지막까지 다산일파를 모해하는 일에 앞장서고 탄압하는 일만 계속하여 다산은 파멸하게 됩니다.

때문에 다산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쟁이 앞서는 과거(科擧)공부만 크게 여기고 도의(道義)는 강론하지 않다보니 친구간의 신의가 무너져버렸다”(科擧爲主 而道義不講 朋友之信乖矣 : 示兩兒)라고 세상을 개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벗과의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적 신의는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좌우상하가 온통 불신으로 가득 찬 오늘의 세상, 다산의 개탄이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져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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