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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와 율곡(栗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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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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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와 율곡(栗谷)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일은 역시 선비인 학자들의 만남입니다. 그저 갑남을녀(甲男乙女)인 보통사람과의 만남도 의미가 깊기 마련이거늘, 더구나 일세의 학자나 철인(哲人)들과의 만남은 더더욱 값지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다산의 글자 풀이대로 사람(人)이란 두 사람이 서로 의존해야만 사람의 구실을 하는 것이지 사람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룩될 수 없다고 했으니 인간은 만나야만 일이 이룩되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선왕조 명종13년은 서기 1558년의 해인데, 58세의 노학자인 퇴계 이황선생은 고향인 안동의 도산(陶山)에서 제자들과 강학(講學)하기에 바쁘던 때이고, 23세의 젊고 젊은 율곡 이이선생은 안동에서 멀지 않은 성주(星州)의 목사(牧使)로 계시는 장인어른을 찾아갔던 때입니다.

바로 전 해에 노씨(盧氏)부인을 아내로 맞은 율곡은 인사차 장인을 찾아뵙고는 바로 멀지 않은 도산으로 퇴계를 찾아뵙고 도(道)를 물었습니다.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노학자와 젊은 청년의 대화는 참으로 위대하고 성대했습니다. 우주의 원리와 성리(性理)의 본뜻을 묻고 답하기도 했지만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멋진 선비들의 모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후 율곡은 여러 차례 편지를 올려 도를 묻고 인생을 논하면서 아름다운 만남을 계속했습니다.

다산은 이 두 분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고는 너무 감탄한 나머지 아름다운 해설을 남겼습니다. 율곡이 퇴계에게 소년시절 불교에 감염되어 입산한 뒤 불교공부에 빠졌다가 다시 깨닫고 유교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토하자, 퇴계는 그런 율곡의 용기를 극찬하면서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퇴계의 후학을 아끼고 격려하는 간절한 뜻이 그렇게 절절하자, 다산은 감격하여 “이 편지 전편의 한 글자 한 구절도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此書全扁 一字一句 都不可放過 : 도산사숙록)라고 여기며 주의 깊게 관찰하여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대에 퇴계와 율곡은 그처럼 가깝고 다정하게 학문을 묻고 답했건만, 뒷날에 제자들끼리는 왜 그렇게 당파로 갈리어 그처럼 혹독하게 싸워야만 했을까요. 당파싸움의 무서움은 그런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퇴계학통의 갈암 이현일과 율곡학통의 우암 송시열의 그 격렬한 싸움을 생각하면 퇴계와 율곡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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