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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김수근, 건축가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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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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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김수근, 건축가 김수근

인터뷰 : 승효상(건축가)


그러니까 제가 처음 김수근 선생님을 만난 게 1974년 여름이었어요. 같은 과 친구 아버지가 김수근 선생과 친구분이라 친구들 여럿이서 같이 만나 뵐 기회가 있었지요. 처음 뵈었는데 카리스마가 화악 느껴지더군요. 속으로 대단하다 생각하면서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야, 자장면 먹고 가야지” 하면서 불러 세우셨어요. 참 매력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 승효상 (건축가)


사실 처음엔 김수근 선생님 문하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요. 졸업 후 유학갈 생각이었죠. 유신 반대로 데모를 하던 때라 수업도 별로 없어서 학교에도 잘 안 나갔죠. 그런데 졸업 전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는데 김희춘 선생님이 졸업하고 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데 저한테는 안 물어보시는 거예요. 학교를 하도 안 나가서 나를 잊으셨나 보구나 하고 속으로 슬퍼했지요. 그런데 강의실을 나가시면서 “승효상군은 내 방으로 좀 오게” 그러시는 거예요. 오오~ 깜짝 놀랐지요. 방에 들어가 앉기도 전에 “자네는 김수근한테 가지그래” 그러시더군요. 물어보시는 것도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그러셔서 몹시 놀랐지만, 감격스러워서 금방 “예, 그러겠습니다”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거시는 거예요. “이러이러한 애가 있는데 보낼 테니 좀 써주시오” 그렇게 해서 유학을 접고 김수근 선생님 문하로 들어가게 됐지요.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가 김수근으로 불리는 게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불러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오셔서 건축을 하려 하셨을 때 국내 환경은 매우 열악했어요.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요. 좋은 건축을 하려면 그런 부분을 많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건축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건축전문잡지도 만드시고, 예술가들 후원도 많이 한 결과 타임지에서 선생님을 한국의 메디치 로렌조라고 표현했죠(사진). 제가 보기엔 혼자 가슴앓이를 하시면서,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시는 걸로 주변정리를 하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55세로 돌아가셨는데 그 나이면 건축계에서는 요절입니다.



내로라하는 건축계 거장들 대부분이 7~80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얼마 전에 일본의 거장 건축가 겐조가 90에 죽고, 필립 존슨은 거의 100살에 죽었는데 55세면 반밖에 못 산 셈이지요. 지병이 있긴 했지만, 그 지병은 시대가 가져다준 병이지 개인의 지병이 아니에요. 결국 그 스트레스, 가슴앓이로 요절하신 거죠. 그 바탕 위에 우리가 있는 셈이에요. 굉장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때까지 건축은 형태예술로 인식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처음으로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셨어요.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벽이나 천장, 바닥은 결국 공간을 한정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한국의 첫 현대건축가인 셈이었어요. 귀한 역할을 하셨지요.

유작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닙니다. 건축 이력 25년 동안에 50여 개를 남기셨어요. 1년에 두 개 정도밖에 안 하신 거죠. 리스트에 있는 건 100여 개이지만 어떤 건 계획안이고, 지어지지 않은 것도 있고, 할 수 없이 못하신 것도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워낙 주옥 같은 작품들이라 굉장히 많은 건축물을 남기신 것처럼 인식이 되지요.

제가 처음 선생님의 건축 작업에 참여한 게 마산성당입니다. 제 나이 스물다섯이었지요. 그 후 연이어서 경동교회와 청주박물관 작업에 참여했어요.




선생님이 80년도에 돌아가시자 제가 ‘공간’의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공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선생님보다 더 김수근적인 건축을 하기 위해 애썼지요. 그런데 하다보니 이게 김수근 건축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선생님을 욕되게 하는 건 아닌가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안 되겠다하고 89년도에 독립을 했지요. 그러고 나서 이제 승효상 건축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승효상 건축이 뭔지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찾아낸 ‘빈자의 미학’이란 개념을 건축의 화두로 삼고 처음 설계한 게 수졸당입니다. 이 수졸당으로 4회 김수근 문화상을 탔습니다. 수졸당은 승효상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사실 김수근 선생이 가르침을 주셨던 공간에 대한 문제가 절실히 녹아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축을 문화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 재개발된다고 확정되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걸어요. 자기가 살았던 집이 허물어지는 것은 자기의 기억이 없어지는 거고, 자신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걸 기뻐합니다. 그런 것들에 우리는 절망하는데, 김수근 건축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를 하는 겁니다. 건축을 재화로 보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최근에는 세이장(洗耳莊)도 허물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거 참.

요즘 젊은 건축학도들이 김수근 선생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최근에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외국 건축가 이름은 줄줄 꿰면서 말이죠. 전에 어떤 스페인 건축가가 그럽디다. 자유센터를 보더니 스페인에 이런 건축이 있었으면 책이 스무 권은 나왔겠다고 탄복을 하던데... 우리는 김수근 건축을 구시대 부동산쯤으로 알고 그냥 파괴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수근 선생님의 작업도 훌륭하지만 저는 그 안에 담긴 생각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과연 김수근이 어떤 사람이었나 이번 전시를 통해 되짚어보고 되살려보면 좋겠어요. 전시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제게 건축이 뭐냐고 하셨지요? 우리 때는 동료, 친구들이 반정부 데모에 앞장서다 투옥되곤 했어요. 저는 제 분노를 건축에 풀었어요. 건축을 하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듯 존재 이유를 찾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만큼의 분노를 항상 품고 사는 게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고요. 그리고 그걸 발견하면 거기에 자신을 담가야지요. 저는 김수근 선생님 밑에서 15년을 바쳤습니다. 적어도 10년 이상 어느 한 길에 푹 빠져 썩고 문드러져야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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