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에 바친 다산의 정성(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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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4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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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18 회 -
학문에 바친 다산의 정성(誠)
유학 사상에서 ‘정성’이라는 성(誠)의 글자가 지닌 의미의 넓고 큼은 어떤 글자와도 비교할 방법이 없도록 무한한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용』이라는 책에는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 단언하여 정성이 없고서는 사물(事物)이라는 것이 없어, 세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또 『중용』에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고 말하여 지극한 정성을 바쳐야만 쉼, 즉 끊어짐이 없어 천도(天道)나 인도(人道)가 제대로 운행할 수 있다는 무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중용』이라는 동양 지혜의 본산에 그런 내용이 담겼음을 생각하면 ‘성’이라는 글자가 유학 사상에서 점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에 절대로 찬성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다산 또한 큰 차이 없이 ‘정성스러움’이라는 글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지극한 정성에 이르러야만 그래도 보람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던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날 집에 돌아와 공무에 임해야 할 자신의 각오를 읊은 시에서 이미 ‘정성’의 본뜻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공렴(公廉)’이라는 두 글자를 공직생활의 목표로 내걸고, 그것도 대충대충 처리하는 일이 아니라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공렴하겠다는 뜻의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라는 시에서 바로 정성을 다 바치겠다는 각오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뜻을 읽을 만합니다.
강진의 유배지에서부터 다산이 사귄 학자에 이재의(李載毅)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죽산(竹山)에 살았던 이재의는 유배지에서부터 학문을 논하던 사이가 되어 생을 마칠 때까지 가장 가까이 지냈고, 가장 자주 만나 쉼 없이 학문을 토론하였고, 편지를 통해서도 일치하지 않은 학문적 견해를 지녔으면서도 우정은 갈수록 돈독하여 참으로 모범적인 토론을 이어갔던 사이였습니다. 다산은 남인이고, 이재의는 노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받지도 않으면서 참으로 깊고 넓은 학문적 토론에 열심이었습니다.
다산은 이재의에게 보낸 학술논쟁의 편지에서 자신이 지녔던 학문적 태도에 대하여 의미깊은 내용을 토로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학문사변(學問思辨:博學·審問·愼思·明辨)의 공부는 성(誠)이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성이라 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경전을 연구하면서 오직 성만을 찾고 따르고 지키겠습니다. 그 옳은 것을 선택하여 지킬 때에 널리 고증하고 지혜를 다해 정밀하게 연구하여, 마음을 지니는 때에는 거울처럼 공허하게 하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하며, 뜻을 찾는 데에는 재판을 판결하고 수사를 진행하듯이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答李汝弘載毅)”
이렇게 정성을 들이고, 이렇게 정성껏 연구하고 탐색하는 다산의 학문 자세는 거짓과 허위는 개재될 틈새도 없었습니다. 이름 높은 예술가들이 온갖 사위(詐僞)로 남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논문을 표절하여 거짓 박사들이 판치는 요즘의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정성’을 앞세운 다산의 학문하는 자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박석무 드림
학문에 바친 다산의 정성(誠)
유학 사상에서 ‘정성’이라는 성(誠)의 글자가 지닌 의미의 넓고 큼은 어떤 글자와도 비교할 방법이 없도록 무한한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용』이라는 책에는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 단언하여 정성이 없고서는 사물(事物)이라는 것이 없어, 세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또 『중용』에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고 말하여 지극한 정성을 바쳐야만 쉼, 즉 끊어짐이 없어 천도(天道)나 인도(人道)가 제대로 운행할 수 있다는 무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중용』이라는 동양 지혜의 본산에 그런 내용이 담겼음을 생각하면 ‘성’이라는 글자가 유학 사상에서 점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에 절대로 찬성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다산 또한 큰 차이 없이 ‘정성스러움’이라는 글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지극한 정성에 이르러야만 그래도 보람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던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날 집에 돌아와 공무에 임해야 할 자신의 각오를 읊은 시에서 이미 ‘정성’의 본뜻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공렴(公廉)’이라는 두 글자를 공직생활의 목표로 내걸고, 그것도 대충대충 처리하는 일이 아니라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공렴하겠다는 뜻의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라는 시에서 바로 정성을 다 바치겠다는 각오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뜻을 읽을 만합니다.
강진의 유배지에서부터 다산이 사귄 학자에 이재의(李載毅)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죽산(竹山)에 살았던 이재의는 유배지에서부터 학문을 논하던 사이가 되어 생을 마칠 때까지 가장 가까이 지냈고, 가장 자주 만나 쉼 없이 학문을 토론하였고, 편지를 통해서도 일치하지 않은 학문적 견해를 지녔으면서도 우정은 갈수록 돈독하여 참으로 모범적인 토론을 이어갔던 사이였습니다. 다산은 남인이고, 이재의는 노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받지도 않으면서 참으로 깊고 넓은 학문적 토론에 열심이었습니다.
다산은 이재의에게 보낸 학술논쟁의 편지에서 자신이 지녔던 학문적 태도에 대하여 의미깊은 내용을 토로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학문사변(學問思辨:博學·審問·愼思·明辨)의 공부는 성(誠)이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성이라 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경전을 연구하면서 오직 성만을 찾고 따르고 지키겠습니다. 그 옳은 것을 선택하여 지킬 때에 널리 고증하고 지혜를 다해 정밀하게 연구하여, 마음을 지니는 때에는 거울처럼 공허하게 하고 저울처럼 공평하게 하며, 뜻을 찾는 데에는 재판을 판결하고 수사를 진행하듯이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答李汝弘載毅)”
이렇게 정성을 들이고, 이렇게 정성껏 연구하고 탐색하는 다산의 학문 자세는 거짓과 허위는 개재될 틈새도 없었습니다. 이름 높은 예술가들이 온갖 사위(詐僞)로 남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논문을 표절하여 거짓 박사들이 판치는 요즘의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정성’을 앞세운 다산의 학문하는 자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