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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금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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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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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금욕
송 재 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근 일간지에서 흥미 있는 서평을 하나 읽었다.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이란 제목의 책인데, 미국 뉴욕대학교의 미디어 생태학 박사인 저자 수잔 모샤트 여사가 14세, 15세, 18세 난 세 자녀와 함께 호주 남서부의 외딴 마을에 있는 집에서 스마트폰, 아이팟, 컴퓨터, 게임기, TV 등 모든 디지털기기의 스위치를 끈 채 6개월간 생활한 체험담이다. 이 별난 실험을 하게 된 동기는 “컴퓨터 스크린에 진짜 삶(Real Life)을 차단당한 채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온 가족이 정화(淨化)되기 위한 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6개월에 걸친 ‘디지털 금욕’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신문 읽기와 책 읽기 일기 쓰기를 통해서 집중력이 향상되었고,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하던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가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밀도가 증가되었다고 한다. 디지털기기에 의해 오염된 삶이 “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의 별명은 빨리 빨리 
 

  나에겐 수잔 여사의 실험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디지털기기는 현대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임에 틀림없다. 디지털에 의해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빨라지고 편리해졌다. 그런데 이 ‘빠름’이 문제다. 사람들은 디지털기기에 길들여져 어느덧 속도를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찍힌 화면을 그 자리에서 보아야 하고, TV 채널도 손으로 돌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리모컨이 등장했다. 인터넷 접속은 빠를수록 좋다. 빠른 것이 좋긴 하지만 이렇게 미친 듯이 속도를 추구하다 보면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과속으로 인한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사고는 인간 사고력의 저하이다. 무한 속도전의 와중에 휩쓸리게 되면 창조적 사고를 할 겨를이 없어진다. 기존의 지식을 머릿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야만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인데, 손쉽고 빠른 인터넷식 지식 사냥만으로는 참다운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없다. 창조적으로 사고하려면 속도가 아닌 여유가 필요하다. ‘학자’를 뜻하는 영어 ‘scholar’의 그리스어 어원이 ‘여유’라는 의미를 가진 ‘scole’라고 한다. ‘여유’와 ‘학자’가 얼핏 관계없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유로움은 창조적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80여 년을 살았다.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면 집까지 산책을 하면서 그날의 철학적 사고를 정리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여유로운’ 이 산책길의 사색이 칸트 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적절한 유추가 아닌 줄 알지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칸트가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수로 있다면 과연 그만한 철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1년 단위로 규격적인 논문을 생산해야 하는 지금과 같이 제도화된 학문 풍토에서는 제아무리 칸트인들 위대한 업적을 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강요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여유로운 산책길의 사색이 칸트 철학의 모태(母胎)가 아니었을까? 

  앞으로 들어설 세종시의 모든 학교는 이른바 ‘스마트 스쿨’ 시스템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학생들은 책과 가방 없이 등교하고 모든 수업과정은 전자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학생이 등교해서 교실 문 앞에 서면 문은 자동으로 열리고 알림판에 “철수야 안녕, 오늘 체육 수업시간에 배구하는 것 알지?”라는 문자가 뜨는 식이다. 이런 스마트 스쿨 구축에 학교당 20억 원이 든다고 한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일까? 20억 원을  학교폭력 예방에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온통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집요한 디지털의 유혹을 뿌리치고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디지털 금욕’을 단행한 수잔 여사의 결단에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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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송재소
· 성균관대 명예교수
· 전통문화연구회 이사장
· 저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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