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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본 일본과 오늘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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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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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2 호

다산이 본 일본과 오늘의 일본 
조 광 (고려대 명예교수·연세대 석좌교수)


  다산 정약용은 역사에서 변화와 발전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야만이 문명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명과 야만의 구분 기준을 유학적 가치의 존중 여부에 두었다. 그 당연한 결과로 그는 유학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고 있는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적(夷狄) 즉 야만으로 인식되어 오던 탁발씨(拓拔氏)까지도 이미 문명국에 접어든 존재로 해석했다. 그의 이 기준은 이웃 나라 일본을 이해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조야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즉, 17세기 조선의 지배층에서는 일본이 일으킨 전란과정에서 꽃피운 삼강오륜과 관계되는 유교적 미담들을 수록한 글들을 널리 장려했다. 그리하여 유교적 가치를 선양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 주고자 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의 침략을 무찌른 여러 무인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명장전」(名將傳)의 형태로 편집되어 일본에 대한 증오를 유전시켜 주고 있었다.

다산은 일본의 문화수준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17세기의 문학작품인 「박씨부인전」에 나타나는 일본에 대한 관념은 그 배일감정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주로 한글을 사용하던 부인층이나 일반 민중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박씨부인전」의 대일본관은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드러내 준다. 이렇듯 일본은 우리나라의 지배층으로부터 민중들에게까지 공통된 가상적(假想敵)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다산 정약용도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을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가고 있었다. 이때 정약용은 일본의 유학에 접하고 나서 일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일본 고학파(古學派)의 대표적 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및 오규 소라이(荻生狙徠, 1666-1728), 다자이 순다이(太宰春台, 1680-1747)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의 글을 읽고서 이제 일본은 군사력에 의존하여 이웃나라를 약탈하던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유학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의를 알게 된 개명된 나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이 계열의 학파 외에도 국수를 지향하는 국학파의 인물들도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다산 정약용은 이들의 글까지 철저히 검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한 면만을 보고서 그 진면목을 본 듯이 말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떠나고 40년 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강요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시작되었고, 그 후의 한일관계는 두 나라의 국민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길로 내달았다. 물론 그 불행은 가해자였던 일본인보다 피해자였던 한국인들에게 더 큰 고통으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한일양국은 독립국가로 공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한일양국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국정부에서는 일본과 한일군사정보협정을 은밀히 추진하다가 끓어오르는 반대 여론에 굴복하게 되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꼼수를 부려 군사정보협정을 비밀리에 진행시켰던 그 잘못된 시도는 ‘제2의 을사늑약’이라 지탄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전개되었던 불행했던 과거사를 덮어두고서는 어떠한 역사적 진전도 불가능함을 말해준다.

과거사 해결은 역사인식부터 달리 해야


  현 정부는 그 출발초기에 “과거사가 미래로 나아가는 발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겨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었다. 그리고 양국간에 진행되어 오던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 새로운 밀월의 시대를 열기에 역사문제는 너무나 거추장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새로운 밀월의 시대가 열리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서 처럼, 과거사는 계속해서 ‘새 시대’의 개막에 제동을 걸었다. 인류의 역사는 말한다. 과거사의 정리 없이 진정한 새 시대는 결코 열리지 않는 법이라고...
 
 

  최근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독도문제는 일본의 조선침략과정에서 일어난 과거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이 이를 현실적인 영토분쟁으로만 몰아가려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독도방문을 ‘일과성 이벤트’이며, 국내에서의 인기를 올리기 위한 ‘애국 퍼포먼스’ 정도로 폄하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도 된다고 잠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일본에 관한 정보가 넘쳐난다. 다산 정약용이 살아나서 오늘날의 일본을 바라본다면, 그는 일본에 대해서 과거사의 정리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독도문제가 역사문제임을 밝힐 것이다. 또한 역사문제의 해결에는 소홀하면서도 독도를 방문하는 수미불상통(首尾不相通)한 일을 나무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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