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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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4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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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 한 정성을 소리에 담아
작곡가 박-파안 영희 (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
http://www.pagh-paan.com
도올 김용옥 (金容沃)교수가 작명해 주신 작곡가 박-파안 영희(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씨의 예명, 파안(琶案-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은 세계의 음악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녀의 본체를, 일언(一言)으로 설명하는 아마도 가장 적합한 말 일것이다.
29세에 도독하여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책상앞에 무릎을 꿇고,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음 한음에 정성을 다하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자태에서, 오선지 한장 한장에 소리의 영혼을 담아내려는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소박하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웅대한 곡들도 그녀의 소박함을 함축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음악은 청중에게 진실성을 전달하고,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귀를 귀울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어렸을때의 꿈은 건축공부를 해서, 나의 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결국 나는, 말하자면 시간속에서, 또 음악속에서 집을 짓는 건축가가 되었지요. 특히나 나는 음들이 그냥 흘러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자 (老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음들을 동시에 짜임새있는 하나의 잘 설계된 건축물처럼 작곡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자면, 동양화의 산수도나 풍속화처럼 말입니다. 그림의 앞부분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그리고 그 중?觀?빈 공간에 한 선비와 차를 끓이는 아해, 그리고... 뒷부분엔 또한 우뚝서 있는 큰 산, 그 큰 산 위로 혹은 아래에 펼쳐져 있는 구름들, 그 뒷부분에 희미하게 보이는 또 다른 형상의 산. 이 모든 스펙트럼이 동시에 음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박-파안 영희씨는 1945년 한국의 교육의 도시인 청주에서 출생, 청주 여자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열 살의 나이에 잃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그녀의 어린시절 음악과의 친숙해 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축을 하시는 분이셨는데, 시간이 날때마다 시를 읊으시고 퉁소를 부시곤 하셨다. 그리고, 어린 박영희는 매일밤 아버지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 그녀의 언니로 부터 받은 피아노수업을 토대로, 직접 시를 지어 곡을 붙여보곤 하였다.
„1950년대 우리나라 개인가정에 피아노를 찾아보기란 거의 힘든일 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나는 진짜 피아노의 크기와 똑같은 종이 피아노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울리지 않는 피아노소리를 혼자 상상해 가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곤 했었지요."
또한, 청주의 장터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경험했던 민요와 창, 판소리, 굿판 등 우리의 소리들은, 짧았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함께, 지금까지도 그녀에겐 고향의 소리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1964년 한일 국교수립에 반대하며 터졌던 6·3사태, 1967박정희의 6·8 부정선거 규탄 투쟁, 1968년 한일회담반대 등의 정치적인 동요들은, 서울대 음악대학 재학시절(1965 - 1971)그녀의 의식을 자각하는 동기가 된다. 당시의 유럽의 음악풍조를 모방만 하던 작곡형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끼며, 그녀에게 1968년부터, 국악을 공부하는 계기를 부여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국악기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 등, 새로운 한국음악을 한국의 문화유산과 결부를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된다.
그러한 커다란 포부와 결단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 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까지 5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 5년이란 긴 시간은 그녀에게 새로운, 자유로운 창작의 힘으로 촉매작용을 하게된다.
1974년 박-파안 영희씨는, DAAD 장학생으로 독일유학길에 올라 프라이부룩(Musikhochschule Freiburg i. Br.) 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에게 작곡을 브라이언 퍼니하우(Brian Ferneyhough)에게 분석을, 페터 푀르티히 (Peter Förtig)에게 음악이론을, 에디트 피흐트 악센펠트(Edith Picht-Axenfeld)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독일에서의 두번째 작품(1977)인 클라리넷과 현악 3중주를 위한 „만남" („Man-Nam" für Klarinette und Streichtrio) 으로 보스빌에서 개최되는 국제작곡가세미나에서 1등상 (1. Preis beim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 1978) 받은 후, 자알란트 방송국(Saarländischer Rundfunk)의 위촉으로 세번째 작품을, 그리고 네번째 작품이자, 많은 젊은작곡가들의 꿈인 도나우에슁엔음악제 (Donaueschinger Musiktage)로부터의 위촉곡인 그녀의 첫 관현악곡 „소리 (1979-1980)" 가 도나우에싱엔음악제에서 발표가 되면서 작곡가 박-파안 영희로 급격히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80년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때, 그녀가 받은 도나우에슁엔음악제로 부터의 위촉은 외국인으로서 받은 위촉이라서만이 아니라, 첫 위촉 여성작곡가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이런 영광과 명성을 그렇게 빨리 유럽음악계으로부터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당시 자기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두 작품으로 큰 성과를 얻고 이름이 알려진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라는 법은 없지요. 두 세마리의 벌들이, 봄을 만드는 것이 아닌것 처럼 말입니다. 한 작품을 쓰고 또 한 작품을 쓰면서 언젠간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작품이 열개가 되면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다시말하자면 내 직업이 작곡가라고 명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열개라고 한정한 이 작품의 수는 갯수를 뜻 하는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요. 30대에서 40대가 될때까지 결정을 해야만 했었지요. 내가 무엇을 쓸것인지 그리고는 나는 나의 모든 정신을 음악에 몰두했어요. 약 40여곡을 완성한 지금에서야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것 같아요. 내가 내 자신 스스로로부터 작곡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정말 긴 시간을 필요로 했었던것 같아요. "
하지만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겸손과는 달리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제 5회 작곡가세미나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에서 1등상 수상, 1979년 파리 유네스코 주최(Rostrum of Composers, Unesco, Paris) 작곡콩쿨에서 1등상 수상, 1980년 한국 난파음악상, 1980년 슈튜트가르트(Stuttgart)시 주최의 작곡콩쿨에서 1등상, 1980/81년 쥣베스트 방송국의 장학기관인 하인리히 슈트로벨(Heinrich-Strobel-Stiftung des Südwestfunks) 에서 작곡가 수여하는 장학생으로 선정, 체류 작품활동, 1985년 바덴 뷔르텐베르크 예술장학재단(Kunststiftung Baden-Württemberg) 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 199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선정한 여성작곡가상 수상등은 그녀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하나의 작은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는 자신의 작품활동에 있어 성공의 의미를 작곡자와 연주자의 관계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내 작품의 연습을 마친 후 연주자들이 내게, 당신의 작품연습을 기꺼이 한다고 할때나, 혹은 연습을 하면 할 수록 연주자들이 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나는 비로소 첫 성공의 기쁨을 맛 봅니다."
연주자들로부터의 이런 코멘트들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작품에 확신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내가 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난 후에는 연주자들이 그들의 개성과 인격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연주를 해 주었을 때에서야, 청중들이 작품을 충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것 이지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특히 연주자들의 역할이 당신의 작품활동에 가장 중요한, 그들의 그런 수고와 열성없이는 자신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고 좋은 연주인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를 한다.
안진아
작곡가 박-파안 영희 (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
http://www.pagh-paan.com
도올 김용옥 (金容沃)교수가 작명해 주신 작곡가 박-파안 영희(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씨의 예명, 파안(琶案-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은 세계의 음악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녀의 본체를, 일언(一言)으로 설명하는 아마도 가장 적합한 말 일것이다.
29세에 도독하여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책상앞에 무릎을 꿇고,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음 한음에 정성을 다하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자태에서, 오선지 한장 한장에 소리의 영혼을 담아내려는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소박하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웅대한 곡들도 그녀의 소박함을 함축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음악은 청중에게 진실성을 전달하고,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귀를 귀울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어렸을때의 꿈은 건축공부를 해서, 나의 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인지 결국 나는, 말하자면 시간속에서, 또 음악속에서 집을 짓는 건축가가 되었지요. 특히나 나는 음들이 그냥 흘러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자 (老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음들을 동시에 짜임새있는 하나의 잘 설계된 건축물처럼 작곡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자면, 동양화의 산수도나 풍속화처럼 말입니다. 그림의 앞부분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그리고 그 중?觀?빈 공간에 한 선비와 차를 끓이는 아해, 그리고... 뒷부분엔 또한 우뚝서 있는 큰 산, 그 큰 산 위로 혹은 아래에 펼쳐져 있는 구름들, 그 뒷부분에 희미하게 보이는 또 다른 형상의 산. 이 모든 스펙트럼이 동시에 음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박-파안 영희씨는 1945년 한국의 교육의 도시인 청주에서 출생, 청주 여자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열 살의 나이에 잃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그녀의 어린시절 음악과의 친숙해 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건축을 하시는 분이셨는데, 시간이 날때마다 시를 읊으시고 퉁소를 부시곤 하셨다. 그리고, 어린 박영희는 매일밤 아버지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 그녀의 언니로 부터 받은 피아노수업을 토대로, 직접 시를 지어 곡을 붙여보곤 하였다.
„1950년대 우리나라 개인가정에 피아노를 찾아보기란 거의 힘든일 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나는 진짜 피아노의 크기와 똑같은 종이 피아노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울리지 않는 피아노소리를 혼자 상상해 가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곤 했었지요."
또한, 청주의 장터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경험했던 민요와 창, 판소리, 굿판 등 우리의 소리들은, 짧았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함께, 지금까지도 그녀에겐 고향의 소리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1964년 한일 국교수립에 반대하며 터졌던 6·3사태, 1967박정희의 6·8 부정선거 규탄 투쟁, 1968년 한일회담반대 등의 정치적인 동요들은, 서울대 음악대학 재학시절(1965 - 1971)그녀의 의식을 자각하는 동기가 된다. 당시의 유럽의 음악풍조를 모방만 하던 작곡형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끼며, 그녀에게 1968년부터, 국악을 공부하는 계기를 부여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국악기를 위해서 작품을 쓰는 등, 새로운 한국음악을 한국의 문화유산과 결부를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된다.
그러한 커다란 포부와 결단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 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까지 5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 5년이란 긴 시간은 그녀에게 새로운, 자유로운 창작의 힘으로 촉매작용을 하게된다.
1974년 박-파안 영희씨는, DAAD 장학생으로 독일유학길에 올라 프라이부룩(Musikhochschule Freiburg i. Br.) 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에게 작곡을 브라이언 퍼니하우(Brian Ferneyhough)에게 분석을, 페터 푀르티히 (Peter Förtig)에게 음악이론을, 에디트 피흐트 악센펠트(Edith Picht-Axenfeld)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독일에서의 두번째 작품(1977)인 클라리넷과 현악 3중주를 위한 „만남" („Man-Nam" für Klarinette und Streichtrio) 으로 보스빌에서 개최되는 국제작곡가세미나에서 1등상 (1. Preis beim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 1978) 받은 후, 자알란트 방송국(Saarländischer Rundfunk)의 위촉으로 세번째 작품을, 그리고 네번째 작품이자, 많은 젊은작곡가들의 꿈인 도나우에슁엔음악제 (Donaueschinger Musiktage)로부터의 위촉곡인 그녀의 첫 관현악곡 „소리 (1979-1980)" 가 도나우에싱엔음악제에서 발표가 되면서 작곡가 박-파안 영희로 급격히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80년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때, 그녀가 받은 도나우에슁엔음악제로 부터의 위촉은 외국인으로서 받은 위촉이라서만이 아니라, 첫 위촉 여성작곡가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이런 영광과 명성을 그렇게 빨리 유럽음악계으로부터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당시 자기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두 작품으로 큰 성과를 얻고 이름이 알려진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라는 법은 없지요. 두 세마리의 벌들이, 봄을 만드는 것이 아닌것 처럼 말입니다. 한 작품을 쓰고 또 한 작품을 쓰면서 언젠간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작품이 열개가 되면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다시말하자면 내 직업이 작곡가라고 명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열개라고 한정한 이 작품의 수는 갯수를 뜻 하는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요. 30대에서 40대가 될때까지 결정을 해야만 했었지요. 내가 무엇을 쓸것인지 그리고는 나는 나의 모든 정신을 음악에 몰두했어요. 약 40여곡을 완성한 지금에서야 내가 나를 작곡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것 같아요. 내가 내 자신 스스로로부터 작곡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정말 긴 시간을 필요로 했었던것 같아요. "
하지만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의 겸손과는 달리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제 5회 작곡가세미나 (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에서 1등상 수상, 1979년 파리 유네스코 주최(Rostrum of Composers, Unesco, Paris) 작곡콩쿨에서 1등상 수상, 1980년 한국 난파음악상, 1980년 슈튜트가르트(Stuttgart)시 주최의 작곡콩쿨에서 1등상, 1980/81년 쥣베스트 방송국의 장학기관인 하인리히 슈트로벨(Heinrich-Strobel-Stiftung des Südwestfunks) 에서 작곡가 수여하는 장학생으로 선정, 체류 작품활동, 1985년 바덴 뷔르텐베르크 예술장학재단(Kunststiftung Baden-Württemberg) 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 199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선정한 여성작곡가상 수상등은 그녀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하나의 작은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파안 영희씨는 자신의 작품활동에 있어 성공의 의미를 작곡자와 연주자의 관계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내 작품의 연습을 마친 후 연주자들이 내게, 당신의 작품연습을 기꺼이 한다고 할때나, 혹은 연습을 하면 할 수록 연주자들이 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때, 나는 비로소 첫 성공의 기쁨을 맛 봅니다."
연주자들로부터의 이런 코멘트들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작품에 확신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내가 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난 후에는 연주자들이 그들의 개성과 인격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연주를 해 주었을 때에서야, 청중들이 작품을 충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것 이지요"
작곡가 박-파안 영희씨는 특히 연주자들의 역할이 당신의 작품활동에 가장 중요한, 그들의 그런 수고와 열성없이는 자신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고 좋은 연주인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를 한다.
안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