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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밝히려던 다산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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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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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밝히려던 다산의 열정


진리를 밝히고 만 가지 원리를 꿰뚫어 알아내고 싶던 다산, 그런 욕구와 열정이 있었기에 그만한 학문적 대업(大業)을 이룩해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내 나이 20세 때에는 우주 사이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완전히 그 원리를 정리해내려 했는데, 30세, 40세에도 그러한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 유배를 당한 뒤에는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인 전제(田制), 관제(官制), 군제(軍制), 세제(稅制) 등으로만 생각이 좁혀졌으나, 경전을 연구하는데 많은 혼잡된 것들을 모두 파헤쳐 가장 정통의 유교원리로 돌이키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는 중풍에 걸려 그런 마음이 점점 쇠잔해지지만, 그러나 정신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한가롭게 생각이 떠올라 문득 옛날의 욕구가 다시 일어나곤 한다.”(「학유에게 노자삼아 준 교훈」)

진리를 터득해내려는 학자적 욕구가 충만했던 다산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귀양 살던 48세 때에는 『시경강의(詩經講義)』라는 12권의 책을 완성하여, 벼슬하던 시절 정조임금께서 하문한 『시경』에 관한 800여 조목에 대한 답변을 다시 수정 보완했습니다. 당시에 정조의 극찬을 받은 책으로 『시경』에 대한 훌륭한 연구결과물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 다산은 49세인 다음 해에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3권이라는 책을 저술합니다. 중풍에 쓰러져 글씨를 쓸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제자를 시켜 글씨를 쓰게 했던 그 무서운 학구열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경오년(1810) 봄에 내가 다산초당에 있었는데 함께 있던 둘째 학유마저 고향으로 돌아가 곁에는 제자 이청(李 )만이 있었다. 고요한 산속에 해는 길지만 마음 붙일 데도 없어 때때로 『시경』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이야기하며 이청으로 하여 받아쓰게 하였다. 마침 나는 중풍으로 병이 깊어 정신이 맑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었음은 옛 성인(聖人)의 도(道)에 몸이 닳아 죽은 뒤에야 그만 두려는 욕심에서였다.”(「시경강의보유서」)

이 얼마나 비장한 진리탐구의 욕구인가요. 저술의욕이 솟구칠 때, 병든 몸으로 제자의 손을 빌려서라도 글을 쓰게 하는 그런 열정이 다산을 만들었다고 믿어집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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