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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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5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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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송 재 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적어도 50세 이상의 사람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을 읽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 그의 괴로운 부르짖음,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의 미친 듯한 순환,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맹수 본래의 야성(野性)을 거세당한 채 철책 속에서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그에게 슬픔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공장형’ 가축 사육이 불러온 보복 아닌가
그러나 2008년 5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과 산채로 매장당하는 닭과 오리들이 철책 속에 갇힌 호랑이보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지금 세계는 인간 광우병과 고(高)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의 공포에 떨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재앙이 아닌가. 풀만 먹고 사는 소에게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동물성 사료를 먹였으니 소가 온전할 리 없다. 더구나 소에게 소의 뼈를 갈아서 먹였으니 그 소가 미치지 않고 어쩌겠는가. 좁고 밀폐된 공간에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고 사육하는 닭과 오리도 면역력이 떨어져 바이러스의 침입에 무참히 무너지는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기 위한 이러한 ‘공장형’ 가축 사육 방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공산품이 아닌 닭과 오리를 공장형으로 사육한 죄에 대한 대가를 인간이 지금 받고 있다. 본성을 억압당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소와 닭, 오리들이 이제 인간에게 무서운 보복을 개시했다고 생각한다면 좀 지나친 환상일까?
인간 광우병에 감염될지도 모를 미국산 쇠고기를 충분한 검토 없이 수입하기로 한 정부의 처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위험성이 높은 30개월 이상 된 소의 고기도 수입하고 광우병 유발 물질로 알려진 뼈와 골수까지 수입키로 한 결정은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한국 정부 단독으로는 수입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는 협약은 이른바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우리도 값싸고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색을 내는 국정 최고 책임자의 발언은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설령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감염될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 ‘극히 낮은 확률’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국민 정서이다.
자기들은 먹지도 않는 것을 팔고자 하고, 이에 굴복하다니
이러한 국민 정서를 헤아리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에 대한 장관고시가 발표되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철회 또는 재협상을 요구하며 수 만 명의 시민들이 연일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우병도 광우병이지만 지금 시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분노하고 있다. 정부에서 결정하면 국민들이 따르리라고 여긴 오만한 자세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는 대기업 CEO와 부하 직원들과의 관계와 다르다. 역사상 어디에 국민을 이기는 정부가 있었던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파악한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낸다고 하니 기다려 볼 따름이다.
2008년 5월의 이 땅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치솟는 기름 값 때문에 멈춰선 화물차와 출어(出漁)를 포기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2008년 세계경쟁력 보고서’에서 조사대상 55개국 중 한국의 생활비 물가가 1위를 차지했다는 신문보도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의 하늘을 누렇게 물들인 황사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미국, 자기들은 먹지 않고 버리는 소의 내장과 뼈까지 강제로 팔아먹으려는 미국의 행위와 이에 굴복한 우리의 처지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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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송 재 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적어도 50세 이상의 사람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을 읽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 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 그의 괴로운 부르짖음,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의 미친 듯한 순환,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맹수 본래의 야성(野性)을 거세당한 채 철책 속에서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그에게 슬픔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공장형’ 가축 사육이 불러온 보복 아닌가
그러나 2008년 5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과 산채로 매장당하는 닭과 오리들이 철책 속에 갇힌 호랑이보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지금 세계는 인간 광우병과 고(高)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의 공포에 떨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재앙이 아닌가. 풀만 먹고 사는 소에게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동물성 사료를 먹였으니 소가 온전할 리 없다. 더구나 소에게 소의 뼈를 갈아서 먹였으니 그 소가 미치지 않고 어쩌겠는가. 좁고 밀폐된 공간에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고 사육하는 닭과 오리도 면역력이 떨어져 바이러스의 침입에 무참히 무너지는 것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기 위한 이러한 ‘공장형’ 가축 사육 방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공산품이 아닌 닭과 오리를 공장형으로 사육한 죄에 대한 대가를 인간이 지금 받고 있다. 본성을 억압당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소와 닭, 오리들이 이제 인간에게 무서운 보복을 개시했다고 생각한다면 좀 지나친 환상일까?
인간 광우병에 감염될지도 모를 미국산 쇠고기를 충분한 검토 없이 수입하기로 한 정부의 처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위험성이 높은 30개월 이상 된 소의 고기도 수입하고 광우병 유발 물질로 알려진 뼈와 골수까지 수입키로 한 결정은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한국 정부 단독으로는 수입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는 협약은 이른바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우리도 값싸고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색을 내는 국정 최고 책임자의 발언은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설령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감염될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 ‘극히 낮은 확률’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국민 정서이다.
자기들은 먹지도 않는 것을 팔고자 하고, 이에 굴복하다니
이러한 국민 정서를 헤아리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에 대한 장관고시가 발표되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철회 또는 재협상을 요구하며 수 만 명의 시민들이 연일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우병도 광우병이지만 지금 시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분노하고 있다. 정부에서 결정하면 국민들이 따르리라고 여긴 오만한 자세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는 대기업 CEO와 부하 직원들과의 관계와 다르다. 역사상 어디에 국민을 이기는 정부가 있었던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파악한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낸다고 하니 기다려 볼 따름이다.
2008년 5월의 이 땅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치솟는 기름 값 때문에 멈춰선 화물차와 출어(出漁)를 포기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2008년 세계경쟁력 보고서’에서 조사대상 55개국 중 한국의 생활비 물가가 1위를 차지했다는 신문보도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의 하늘을 누렇게 물들인 황사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미국, 자기들은 먹지 않고 버리는 소의 내장과 뼈까지 강제로 팔아먹으려는 미국의 행위와 이에 굴복한 우리의 처지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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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