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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정조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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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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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정조의 모습은 어땠을까

 박 현 모(한국학중앙연구원)

나는 사극(史劇)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 대목을 제일 좋아한다. 아역 배우들의 참신한 연기도 좋지만, 역사 속 인물들이 서로 인연을 맺게 되는 상황들이 흥미롭다. 그런데 사실 <불멸의 이순신>이나 <이산> 등에서 보았듯이, 사극의 그 대목은 거의 백퍼센트 픽션이다. 사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그래서 작가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그곳이 바로 사극 주인공의 유년시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대목을 볼 때마다 동요 “고향의 봄”이 생각난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나의 살던 고향”이 그것이다. 한국인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좋은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동요와 마찬가지로 사극 속 주인공의 유년시절은 일종의 ‘역사의 고향’이다. 우리들이 추억하고 싶고 희망하는 거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조는 어땠을까? 드라마 <이산>에서 주인공 이산은 성송연, 박대수와 함께 우정을 약속한 것으로 나오는데, 과연 그랬을까?




유년기 정조를 연상시키는 두 이미지, 책과 종소리




우선, 어린시절 정조의 모습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기록은 <정조실록>의 정조 행장(行狀)이다. 왕의 사후 이만수가 쓴 이 행장에는 정조가 태어나서 자라는 모습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조실록>이나 <홍재전서>에서도 세손시절의 정조의 모습이나 어록을 볼 수 있지만, 객관적 묘사에 있어서 행장을 못 따라간다.




어린 시절 정조의 첫 번째 이미지는 책과 종소리이다. 정조는 유난히 책을 좋아해서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보면 금방 좋아라” 했고, “첫돌이 돌아왔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소곳이 앉아 그저 책만 펴들고 읽었다”고 한다. 다소 의심이 드는 구절이긴 하지만, <영조실록>에 기록된 고전에 대한 소년 정조의 해박한 지식을 보면 책 좋아하는 그의 성벽이 타고난 것임을 알 수 있다.




행장을 보면, 정조가 태어나던 날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종소리[洪鍾]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다”고 한다. 정조의 목소리는 크고 맑았던 듯, 스승 박성원은 “세손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영조실록 36/08/02)고 말했으며, 영조 역시 어린 손자의 책 읽는 소리 듣는 것을 즐겨했다.




유난히 제왕학 공부를 강조했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묻는 족족 “메아리처럼 응답을 잘하는” 세손 정조를 예뻐했다. <영조실록>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특하다” “이보다 더 잘 대답할 수는 없다[善對無過於此矣]”는 영조의 칭찬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1761년 정월에 영조는 “어진 사람이 늘 좌우에 있으면서 너를 권면하면 고달프지 않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열 살의 정조는 “어진 이가 저로 하여금 어질게 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야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영조로부터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영조실록 37/01/05). 그해에 또한 영조는 정조를 데리고 처음으로 운종가에 나와 백성들을 만나보게 한 뒤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네게 무엇을 기대하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조는 “선을 행하기[爲善]를 바랐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선을 행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더냐”고 묻는 영조에게 그는 “쉽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쉽다고 생각해야만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 영조를 “매우 기쁘게 했다.”




영조의 칭찬 교육법과 책벌레 정조의 유별난 자기관리




다음으로,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자기관리에 엄격했다. 행장을 보면, 정조는 네 살 때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猶不釋卷]”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독서에 들어갔다. 혜경궁이 그의 독서열이 너무 지나친 것을 염려해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르자 정조는 “그때부터는 남이 모르게 등불을 가리고 세수했다.”고 한다. 이는 태종이 아들 충녕대군의 건강을 염려해 책을 치우자 몰래 책을 읽었다는 대목과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네 살 먹은 정조가 ‘등불을 가리고 세수했다[每遮燈而]’는 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 말은 ‘책을 읽기 위해 세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어린 충녕이 ‘다른 책을 취해서 전부 읽었다[乃取盡閱]’는 <태종실록>과 비교해 볼 때어, 외모에도 꽤 신경을 썼던 정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정조는 자기관리에 엄격해 “너덧 살부터 늘 꿇어앉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바지의 무릎 닿는 곳이 먼저 떨어졌다.”고 한다. 자라서도 이런 습관은 계속되었는데, 정조 자신의 말처럼 “적당히 편하게 지낼 방법도 생각하였으나 습관이 되어 고치기 어려울” 정도였다(정조실록 20/4/25). 그는 “공경함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옳음으로 밖을 올곧게 한다[敬以直內義以方外]”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었던 바(홍재전서 161권 일득록), 자신의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심지어 그는 아파 누워 있을 때에도 영조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다. 열네 살이 되던 1765년의 겨울에 영조는 병중의 정조로 하여금 칸막이 너머에서 신하들과의 소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면서 정조의 반응을 살폈다. 좌우에서 “세손이 그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면 영조는 기뻐서 “세손이 마음가짐이 강해[世孫執心固]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신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을 편케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달빛의 메타포와 쟁기질하는 청년 정조




정조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달이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를 간행하면서 자기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지었거니와, 세손시절부터 이미 달과 관련된 비유를 즐겨 쓰곤 했다. “화려한 누각 동쪽에서/ 달이 처음 솟더니/ 달빛이 닿는 곳마다/ 마음도 따라 비추네/ 삼천 대천 세계를/ 달빛아 두루 비추어라/ 본래부터 하늘은 십분 맑은 것이라오” 라는 시가 그 한 예다(홍재전서 1권 춘저록).




왕위에 올라서도 정조는 신하들과 달밤에 경연을 즐기곤 했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 가을밤에 비가 막 개고 달빛이 뜰 안에 가득하자, 정조는 주렴을 걷고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도 모두 이 달을 보고 있는가. 만인이 모두 우러러 보는 것은 광명쇄락(光明灑落) 네 글자에 있을 뿐이다. 사대부의 가슴도 이와 같아야 하리니, 작은 음영도 드리워 있어서는 안 된다”(홍재전서 175권 일득록). 여기서 보듯이, 정조는 달과 시냇물 사이에 구름이 없는 것처럼, 왕과 신민들 사이에 특정 당파나 탐관오리가 가로막지 않은 직접적 소통의 상태를 좋은 정치라고 말하곤 했다.




정조의 청년 시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이미지는 쟁기질하는 그의 모습이다. 1767년 봄에 영조는 동대문 밖 전농동에 나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는데, 영조에 이어서 정조는 “일곱 번 쟁기를 잡고 밀었다.” 들녘에 나가 쟁기를 잡고 미는 열여섯 살의 청년 정조의 모습도 이채롭거니와, 궁궐에서 자란 정조가 이 과정에서 농사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그에 앞서 1764년에 강관(講官)으로부터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려 얼굴이 누렇게 떴다는 말을 들은 정조는 그날 저녁식사 때 고기를 들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묻는 영조에게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차마 가질 않습니다[心焉惻傷 不忍下箸也]”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해에도 정조는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농사 때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不作無益 以奪民時也]”라고 대답해 영조의 칭찬을 듣고 있다. 정조는 이처럼 어릴 때부터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사 때를 빼앗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 수원화성을 쌓을 때도 이점을 특히 중시했다.




‘국왕의 조건’과 자기통제의 리더십




어린 시절 정조의 모습을 보면서 거듭 생각나는 것은 ‘국왕의 조건’이다. 조선 전기의 세종은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배우기 좋아한다는 것[好學不倦]’과 ‘뛰어난 의견 제시능력[獻議]’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정조의 경우도 학문능력과 그에 기초한 탁월한 토론능력[善對]을 인정받아 할아버지 영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조의 경우 세종과 달리, 열 살 때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자칫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죽거나, 정치보복을 일삼는 폭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영조로부터 “세손이 마음가짐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철저한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정조에게는 칭찬과 격려 중심의 교육을 시행한 것도 효과를 보았다. 즉위한 다음 정조가 ‘연산군의 길’이 아닌 ‘대통합의 탕평군주’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자기 통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리더십은 수신(修身)으로 시작해 수신으로 끝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정조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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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현모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 저서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푸른역사, 2007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세종의 수성(守成)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6 등

· 역서 : 『몸의 정치』, 민음사, 1999

『휴머니즘과 폭력』, 문학과 지성사, 200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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