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48관련링크
본문
제828호
다큐에서 만나는 ‘단순한 진심’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날이 갈수록 다큐(멘터리)는 매력적인 매체로 세상을 떠다닌다. 오늘날 극영화처럼 표를 사고 보는 다큐는 오래전 극장에서 틀어주던 국책성 계몽도구 다큐로부터 엄청난 진화를 보여준다. 이 가을 단풍과 함께 날아온 다큐들을 극장에서 보노라니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즐거움과 함께 용기를 얻는다.
풍자적 다큐에서 탈주의 즐거움을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 2015, 마이클 무어)는 미국의 문제를 추적하는 기발한 다큐이다. 강대국 미국이 세계평화를 내걸고 전쟁을 벌이면서도 패하기만 하자 펜타곤 장성들이 중대한 회의를 연다. 그 해결사로 무어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린다. 풍성한 체구에 야구 모자, 장난기 넘치는 표정의 그는 미국보다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를 침공해 그 비밀을 탈취해오는 여정에 나선다.
경쟁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즐겁게 살려고 8주 유급휴가를 누리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같은 비용으로 햄버거 식판의 미국 학교 아이들과 달리 코스 요리로 미식을 즐기는 프랑스 학교 아이들, 돈 안 내는 슬로베니아의 대학들, 하여 학비가 비싼 등록금 융자 대신 유학을 택한 미국 청년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시민투쟁으로 독재자를 물리친 튀니지는 이슬람 전통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을 만들어가고 있다. 헌법 개정으로 여성인권 혁신을 이루어, 보건소에서 피임약과 낙태 시술을 지원한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는 원칙, 즉 여성의 자궁은 여성의 것이기에 이루어진 변화다.
이렇게 여러 나라를 돌며 엄청 부러운 제도와 그 효과를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무어는 그 자리에 성조기를 꽂고 인증샷을 남긴다. 그 와중에 이런 좋은 제도를 만드는데 미국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자백을 듣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다수 약자를 위한 좋은 제도를 실행하지 않는 것일까? 권력 집단의 이런 비열함과 위선으로부터 무어 스타일의 다큐가 가능하다. 북유럽의 궁핍한 삶을 그린 〈정복자 펠레〉(Pelle The Conqueror, 1987, 빌 어거스트)가 떠오른다. 늙은 아버지와 굶어 죽을 정도로 고생한 소년 펠레의 꿈은 미국으로 건너가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 1924, F.W.무르나우)에서도 미국 부자의 유산으로 빈곤을 극복하는 독일 호텔 안내원을 보여준다. 이렇듯 일할 기회의 평등과 자유, 풍요로움을 향한 아메리칸 드림이 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내놓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대선 후보가 나올 정도로 이상해졌다. 이런 부조리의 틈새를 파고 들어간 무어는 관객에게 풍자의 묘미를 전해주는 고발 다큐로 일가를 이룬 셈이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피어난 다큐의 힘
10회를 맞이한 여성인권영화제의 개막작 〈테레즈의 삶들〉(The Lives of Therese, 2016, 세바스티앙 리프시츠)은 68혁명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테레즈 클레르크를 만나게 해준다. 죽음을 말하지 않는 세상 풍조에 저항하며 ‘삶-죽음’을 횡단하는 기록을 남기고픈 그녀의 요청으로 기획된 다큐이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는 네 자녀는 대화 중 이렇게 자백한다. “네 엄마는 내 엄마와 다르다”라고. 웃다가 울기도 하면서…. 모범적인 주부에서 공동체적 삶의 전사로 변화한 그녀는 임신중단권부터 성평등, 성소수자 인권 운동까지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로서 인생길을 걸어간다. 즉 하나의 인생길에서 다른 인생길로 바꿔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그녀는 자신의 인생들과 투쟁, 사랑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돌아보며, “투쟁은 과격하게 삶은 단순하게”의 묘미를 전해준다.
이 땅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누리는 독립 다큐들이 왕성하게 제작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자백〉(Spy Nation, 2016, 최승호)은 분단 현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간첩조작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2012년 탈북한 화교출신 유우성씨는 동생의 ‘자백’을 통해 간첩으로 몰린다. 결국 2015년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무죄 선고로 결판이 난 이 사건의 음모가 한국, 중국, 일본, 태국을 넘나든 40개월간에 걸친 추적을 통해 밝혀진다. 황당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다큐의 마지막 자막에 줄줄이 이어지는 1만7,000여 명 이름, 그것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피어난 다큐의 힘을 ‘단순한 진심’으로 전해준다.
* ‘단순한 진심’은 제10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였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2005 동국대 명강의상〉수상
· 저서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다산포럼은 일부 지역신문에 동시게재합니다.
다큐에서 만나는 ‘단순한 진심’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날이 갈수록 다큐(멘터리)는 매력적인 매체로 세상을 떠다닌다. 오늘날 극영화처럼 표를 사고 보는 다큐는 오래전 극장에서 틀어주던 국책성 계몽도구 다큐로부터 엄청난 진화를 보여준다. 이 가을 단풍과 함께 날아온 다큐들을 극장에서 보노라니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즐거움과 함께 용기를 얻는다.
풍자적 다큐에서 탈주의 즐거움을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 2015, 마이클 무어)는 미국의 문제를 추적하는 기발한 다큐이다. 강대국 미국이 세계평화를 내걸고 전쟁을 벌이면서도 패하기만 하자 펜타곤 장성들이 중대한 회의를 연다. 그 해결사로 무어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린다. 풍성한 체구에 야구 모자, 장난기 넘치는 표정의 그는 미국보다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를 침공해 그 비밀을 탈취해오는 여정에 나선다.
경쟁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즐겁게 살려고 8주 유급휴가를 누리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같은 비용으로 햄버거 식판의 미국 학교 아이들과 달리 코스 요리로 미식을 즐기는 프랑스 학교 아이들, 돈 안 내는 슬로베니아의 대학들, 하여 학비가 비싼 등록금 융자 대신 유학을 택한 미국 청년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시민투쟁으로 독재자를 물리친 튀니지는 이슬람 전통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을 만들어가고 있다. 헌법 개정으로 여성인권 혁신을 이루어, 보건소에서 피임약과 낙태 시술을 지원한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는 원칙, 즉 여성의 자궁은 여성의 것이기에 이루어진 변화다.
이렇게 여러 나라를 돌며 엄청 부러운 제도와 그 효과를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무어는 그 자리에 성조기를 꽂고 인증샷을 남긴다. 그 와중에 이런 좋은 제도를 만드는데 미국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자백을 듣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다수 약자를 위한 좋은 제도를 실행하지 않는 것일까? 권력 집단의 이런 비열함과 위선으로부터 무어 스타일의 다큐가 가능하다. 북유럽의 궁핍한 삶을 그린 〈정복자 펠레〉(Pelle The Conqueror, 1987, 빌 어거스트)가 떠오른다. 늙은 아버지와 굶어 죽을 정도로 고생한 소년 펠레의 꿈은 미국으로 건너가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 1924, F.W.무르나우)에서도 미국 부자의 유산으로 빈곤을 극복하는 독일 호텔 안내원을 보여준다. 이렇듯 일할 기회의 평등과 자유, 풍요로움을 향한 아메리칸 드림이 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내놓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대선 후보가 나올 정도로 이상해졌다. 이런 부조리의 틈새를 파고 들어간 무어는 관객에게 풍자의 묘미를 전해주는 고발 다큐로 일가를 이룬 셈이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피어난 다큐의 힘
10회를 맞이한 여성인권영화제의 개막작 〈테레즈의 삶들〉(The Lives of Therese, 2016, 세바스티앙 리프시츠)은 68혁명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테레즈 클레르크를 만나게 해준다. 죽음을 말하지 않는 세상 풍조에 저항하며 ‘삶-죽음’을 횡단하는 기록을 남기고픈 그녀의 요청으로 기획된 다큐이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는 네 자녀는 대화 중 이렇게 자백한다. “네 엄마는 내 엄마와 다르다”라고. 웃다가 울기도 하면서…. 모범적인 주부에서 공동체적 삶의 전사로 변화한 그녀는 임신중단권부터 성평등, 성소수자 인권 운동까지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로서 인생길을 걸어간다. 즉 하나의 인생길에서 다른 인생길로 바꿔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그녀는 자신의 인생들과 투쟁, 사랑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돌아보며, “투쟁은 과격하게 삶은 단순하게”의 묘미를 전해준다.
이 땅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누리는 독립 다큐들이 왕성하게 제작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자백〉(Spy Nation, 2016, 최승호)은 분단 현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간첩조작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2012년 탈북한 화교출신 유우성씨는 동생의 ‘자백’을 통해 간첩으로 몰린다. 결국 2015년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무죄 선고로 결판이 난 이 사건의 음모가 한국, 중국, 일본, 태국을 넘나든 40개월간에 걸친 추적을 통해 밝혀진다. 황당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다큐의 마지막 자막에 줄줄이 이어지는 1만7,000여 명 이름, 그것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피어난 다큐의 힘을 ‘단순한 진심’으로 전해준다.
* ‘단순한 진심’은 제10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였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2005 동국대 명강의상〉수상
· 저서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다산포럼은 일부 지역신문에 동시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