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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의 미완성교향곡은 왜 그의 사망시기와 일치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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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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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의 미완성교향곡은 왜 그의 사망시기와 일치하지 않는가?

 

오스트리아 태생인 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는 31세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600여곡의 가곡과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7개의 교향곡등 주옥같은 음악을 우리에게 남겼다. “나의 가장 큰 바램은 모든 너절함을 배제한 하나의 순수한 음악작품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한 시인에게 자신의 창작에 대한 자세와 열정을 편지로 전했다. 그는 비인의 외곽도시에 속하는 Gruenentorgasse11 (초록문 길)에서 1818 년 그의 나이 스물하나 되던 해와 1822년과 1824년등 3번에 걸쳐 살았었다. 필자가 그의 내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4년부터 비인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관련지어진다. 지금은 유학 당시 6년 반 동안 다섯 번의 이사를 했었던 것이 추억이 되어 힘들었던 그 시간 저편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당시 필자에게는 더 이상 이사를 안하고 공부를 끝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섯 번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후 어느날 새벽 필자는 작곡에 대한 불안과 고뇌로 “초록문 길”을 터벅 터벅 걷다가 우연히 한 초등학교 건물 벽에 슈베르트의 흉상이 동판으로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166년전 바로 이곳에서 그가 살았다는 점이 나에게는 우연히 타임머신을 타고 그를 만난 것처럼, 생생하고도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 즉시 필자는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편지와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1822년에 쓴 미완성 교향곡의 스케치와 당시의 기록을 통해서 슈베르트가 1822년에 이 교향곡을 쓰다 죽은 것이 아니고 2악장을 쓴 이후 작곡과정에서 두 악장 모두 3박자이고 스케르쪼로 3악장을 작곡하는 것에 대한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함으로 결국 다른 수많은 작품에 밀려 잊혀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이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단지 작곡상의 문제였을 뿐이다. 미완성교향곡 이후로 그는 1825년 9번교향곡 (분실됨)과 그의 죽은 해인 1929년에 대교향곡을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짧은 삶은 오로지 작곡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 어떤 예술가의 삶보다도 창작에만 몰두한 작업의 시간이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루 최소 15시간 이상의 작업을 했으리라는 점이다. 미완성을 썼던 1822년에 그가 쓴 작품을 한번 나열해 보겠다. 오페라 “알퐁스의 에스크렐라”, 여성합창곡 “자연속의 주님” A Major 미사곡, 피아노 환타지, 음송시인외 30개의 가곡을 그는 초인적으로 한해에 작곡하였다. 이 많은 분량을 동시에 써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작의 작곡가이기도 했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 S. Bach 1685~1750)는 연주가가 스케일로 하루 연습을 시작하듯이 매일 아침 대위법(Counterpoint 작곡기법)을 하나씩 풀고 실제 창작에 임했다고 했다. 이들의 엄청난 창작열은 그 분량만으로 과히 압도적이다. 슈베르트가 음악 전 장르에 걸쳐 방대한 양의 작품을 써 낼 수 있었던 것은 음악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있음을 우리는 그의 음악을 통해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지 200년이 되는 해 이다. 슈베르트는 그의 어머니의 사망원인과 같은 병명인 전염병 장티푸스로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절명할 수 밖에 없었던 그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 슈베르트의 임종 시 31년9달19일1시간30분의 예술가의 삶을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왜 아들의 임종시간을 그렇게 정확히 남기길 원했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바로 그의 생애와 작품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이후로 필자에게 작곡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면 유학시절의 슈베르트와의 만남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베토벤, 말러, 드뷔시, 쇤베르크, 베르그, 바르톡 등의 작곡가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들이 남긴 명 작품과 편지와 일기 속에서 창작의 고통 안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천재작곡가의 고뇌를 가까이 보고 들으면서 깊은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이제 이사의 번거로움은 필자에게 새로운 만남의 기대를 동반하게 되었다. 1990년 귀국 후 벌써 초록의 다른 문으로 4번의 이사를 했으니 말이다.


1997년 봄 이혜성 (경원대학교 작곡과 교수, 경원대신문2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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