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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시성(詩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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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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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시성(詩聖)’이었다”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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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시성(詩聖)’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비탄의 한숨만 나올 뿐,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지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다산처럼 자나 깨나 ‘민(民)과 국(國)’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서 백성들이 넉넉하게 살아가고 국가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만을 바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상일에 무관하게는 살아오지 않았는데,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암담한 생각을 떨굴 수 없는 세상이 요즘입니다. 이른바 ‘진보’라는 이름에 그런 정도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음을 보면서, 당사자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적만 달성하려는 태도를 보면서는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히고 말 뿐입니다.

  이런 때는 시재(詩才)라도 타고났다면 풍자와 비판의 시라도 쓰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신세여서 더욱 가슴이 막혀옵니다. 다산은 정말로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두보야말로 시성(詩聖)이 아니겠느냐? 한유(韓愈)는 시의 대현(大賢)이라 할 수 있고, 소동파(蘇東坡)는 시인으로서는 박사(博士)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寄淵兒)라고 말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에 대한 등급을 매긴 점으로만 보아도 그의 시에 대한 안목은 정말로 높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창작과 문학적 견해」(신구현)라는 북한학자의 논문을 읽어보면,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탁월한 유물론 철학가이며 선진적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문학가이다”라는 결론을 먼저 피력하고, 그의 뛰어난 문학작품과 시작품을 세세하게 열거하면서 그의 문학적 우수성과 시 창작의 탁월성을 심도 있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시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서, “그는 문학 활동도 인민과 나라를 위한 일에 복종시켰다. 시성(詩聖) 정약용의 고상한 사상 곧 예술성은 바로 그의 선진적 문학관과 실천 투쟁에 의하여 달성되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산의 문학관은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선진적이었으며 실천적인 의지와 억울하고 약한 백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투쟁적 의지에서 이룩된 시의 창작이었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다산은 앞의 큰아들 학연(學淵)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보는 시성이고, 한유는 대현이며, 소동파는 박사여서, 자신들 3부자(두 아들과 자신)가 죽도록 노력하면 소동파의 등급에는 도달하겠지만,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시 짓는 일에 3부자가 평생을 바치는 일 따위를 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산은 온 힘을 바쳐 시를 창작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결국 최고 단계인 두보의 등급인 ‘시성’의 지위에 오르고 말았으니, 그의 시의 예술성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그냥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산은 시집에 수록된 시의 편으로는 2,500여 수가 넘고, 지금도 발견되는 미수록된 시도 많으니, 그의 시에 대한 천재성은 어떻게 정확한 표현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위대하다’, ‘시성’이다 라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이 없을 것 같습니다. 뛰어난 시인이었기에, 시로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18 년의 귀양살이를 이겨냈습니다. 요즘처럼 답답한 세상에 시도 못 짓는 우리네 마음은 다산이 부럽기만 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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